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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사 원덕휘에게 내리는 교서[敎統制使元德徽書] 李健命 寒圃齋集 제8권 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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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종사연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2-07-05 22:36 조회931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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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사 원덕휘에게 내리는 교서[統制使元德徽書] 

     출전 : 이건명 한포재집(李健命 寒圃齋集) 8권 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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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사공[휘 덕휘(德徽)]은 문정공(휘 효연) 후 첨추공(孟穟)의 후손으로 계사보

     2권  281면에 보입니다.

 

왕은 말하노라.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였기에 우리 조종(祖宗)께서 바닷가를 살펴 관방(關防)을 설치하였다. 마치 바둑돌이 포진하고 별이 벌려 있듯 대소의 관방이 서로 얽혀 있어 경비를 엄격하게 하여 뜻밖의 변란에 대비하니, 수천 리의 땅이 요충지와 보장(保障) 아닌 곳이 없지만, 남쪽 지방은 더욱 중요하다. 이 때문에 영남과 호서ㆍ남에 모두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두어 첨사(僉使) 이하를 관리하게 하고 진마다 각각 분계(分界)를 둔 것이다.

왜란이 있던 임진년(1592, 선조25)에 통제영(統制營)을 창설하여  바닷길의 요충지를 지키며 삼도(三道)의 수군을 통제하게 하고, 수군절도사가 모두 그 통제를 받아 마치 몸이 팔을 부리고 팔이 손가락을 부리는 것처럼 호령에 막힘이 없게 하였다. 일의 권한이 이에 더욱 무거워져 군량과 병기의 많음과 전함과 기구의 성대함도 따라서 더 불어나 은연중에 바닷가에 세워진 하나의 큰 울타리가 되었다.

만약 통제사에 적임자를 얻으면 삼도의 바닷가 수십여 고을의 병사와 백성들이 그 일을 즐거워하여 대비하고 막음이 적절해서, 조정으로 하여금 남쪽을 돌아보는 근심이 없게 하고 창고에 쌓인 곡식 또한 위급할 때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통제사를 선발하는 것은 다른 곤임(閫任)에 비하여 중요하니, 위엄과 명망, 재주와 지략이 있어서 대체(大體)를 알고 사람들이 두려워하면서도 믿을 수 있는 자가 아니면 변방을 진무하여 나라의 형세를 튼튼하게 할 수 없다.

경의 종조부(從祖父)와 아비 또한 이 직임을 제수받아 대대로 공적이 드러났는데, 지금 경은 선조의 세업(世業) 간성(干城)의 재주 내외직을 역임하여  모두 그 직임에 걸맞았고, 일찍이 절도사로서  호남과 영남을 진무한 것을 가지고 경기의 통어사(統禦使)로 발탁했을 때에도 세상에서 명성이 대단하였다. 지금 조정에서 그대의 재주가 등용하여 쓸 만하다고 천거하는데, 간택함은 실로 나의 마음에 달려 있으니, 나는 경이 이 직임을 맡기에 넉넉하여 능히 전대의 아름다움을 이을 수 있음을 안다.

그러나 내가 걱정하는 바는 근래 기근과 역병으로 백성들이 거의 다 죽어서 편성된 대오에는 허명(虛名)만 군적(軍籍)에 남은 경우가 많은데, 주군(州郡)에서는 첨정(簽丁 장정을 군적에 올림)할 수도 없고, 조적(糶糴)에는 누적된 포흠(逋欠)이 많아 공사의 창고에 저장할 수가 없는 것이니, 그 걱정할 만한 첫 번째 일이다. 장삿배와 오랑캐의 배가 난무하여 바다 한가운데를 오가며 한 번 노를 저으면 천 리를 가는 데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그 종적을 헤아리기 어려워 서쪽 변방의 근심거리가 된 지 오래이다. 또한 남쪽 변방에도 미치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그 걱정할 만한 두 번째 일이다.

내가 이 두 가지에 대해 밤낮으로 곰곰이 헤아려 봤는데도 좋은 계책을 얻을 수 없어서, 행여 우리 충성스럽고 성실한 신하가 백성을 어루만짐을 우선시하여 민심을 얻고 충성스러운 병사들이 변란에 미리 대비하여 변방을 견고하게 함에 힘입으려 하니, 그 책임이 다른 때보다 더욱 중요하다. 내가 생각건대 지형으로 보아도 중요하고 일의 권한으로 보아도 중요하고 선임으로 보아도 중요하며 오늘날의 책임이 또 이와 같이 중요하기에, 반드시 경과 같이 중요한 사람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경을 제수하노라.

경은 그대의 어진 계획을 힘쓰고 장한 계책을 펼 것을 생각하라. 백성을 사랑하는 것은 비용을 아끼는 데에서 시작하여 간소함을 따르도록 힘쓰고, 아랫사람을 검속하는 것은 스스로 신칙하는 것을 먼저 하여 그들의 본보기가 되어라헌 옷의 길함을 생각하여 멀리 도모함에 소홀하지 말고견사(繭絲)의 정사를 뒤로하여 작은 이익에 급급해하지 마라. 침탈에 괴로워하는 병사와 백성에 대해서는 소생시켜 편안하게 할 것을 생각하고 시행함이 완급의 순서를 잃은 것에는 변통할 바를 생각하되, 재품(裁稟)하는 것은 한결같이 옛 전장(典章)을 따르고, 조목조목 아룀에는 빈번함을 꺼리지 마라.

, 삼대의 절개가 한결같음은 실로 고금에 드물기에 조정의 총명(寵命)이 예사롭지 않고 변방 백성들의 갈망이 더욱 간절하니, 마땅히 공공과 나라만을 생각하는 충성에 힘써 그대의 할아버지와 그대의 아비의 공적을 빛내도록 하라.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노니, 이 뜻을 잘 알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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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001] 통제사(統制使) …… 교서 : 원덕휘(元德徽, 1647~1706)의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군미(君美)이다. 경기 수사(京畿水使)ㆍ통제사 등을 지냈고,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재직 중에 별세하였다. 국역 숙종실록271111일 기사에 통제사에 제수된 일이 보이고, 승정원일기숙종 2837일 기사에 하직한 일이 보인다.

[-D002] 왜란이 …… 창설하여 : 통제영(統制營)이란 충청ㆍ전라ㆍ경상도의 삼도수군을 총괄하는 통제사가 있는 본진으로 1593(선조26)에 고성(固城)에 두고 이순신(李舜臣)3()의 통제사로 삼았다. 국역 만기요람 군정편4 주사 총례

[-D003] 경의 …… 드러났는데 : 원덕휘의 종조부는 원숙(元䎘)으로, 1649(효종 즉위년) 114일에 통제사에 제수되었고, 아버지는 원상(元相)으로, 1682(숙종8) 18일에 통제사에 제수되었다. 국역 효종실록 즉위년 114》 《국역 숙종실록 818》 《국역 약천집24 5대 종조 자헌대부 한성부판윤 겸 지훈련원사 오위도총부도총관 공 묘지명[五代從祖資憲大夫漢城府判尹兼知訓鍊院事五衛都摠府都摠管公墓誌銘]에는 원사열(元士悅)의 아들인 원숙(元䎘)과 손자인 원상(元相)은 모두 통제사이고, 증손 원덕휘(元德徽)는 병사이다.” 하였다.

[-D004] 간성(干城)의 재주 : 방패와 성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인재를 말한다. 시경》 〈토저(兎罝)씩씩한 무부(武夫), 공후의 간성이로다.[赳赳武夫, 公侯干城.]” 하였다.

[-D005] 내외직을 역임하여 : 내직으로는 오위도총부 도사(五衛都摠府都事)와 훈련원 부정(訓練院副正), 외직으로는 해남 현감(海南縣監)ㆍ삼수 군수(三水郡守)ㆍ영종 첨사(永宗僉使)ㆍ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ㆍ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 등을 역임하였다. 承政院日記 肅宗 238426, 518, 10126, 161019, 22521, 231211

[-D006] 호남과 ……  : 전라 좌수사와 경상 좌병사를 역임한 경력을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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