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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 원산군 원공(諱 滉)묘갈명 병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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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종사와족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01-09 20:53 조회845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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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송덕상 과암집 권11 

* 번역 : 대연(종사연구위원회 부위원장) 2023. 1. 9. >


원주원씨는 고려의 문하사 홍필에 이르러 가장 드러났다그 증손 낭장 증 참판 헌()은 고려의 진사 원천상(元天常)의 딸에게 장가들었다다른 원(異元)이다공을 낳았는데 휘는 황()으로 후에 어휘(御諱)로 족보와 비판(碑版)에는 모두 ()”으로 썼다관란공(觀瀾公()는 그 동생이다공의 자(), 행적이력 생몰년은 모두 전하지 않아 알 수 없다오직 그 근거할 만한 것은 영락 을유(永樂 乙酉태종5, 1405)년에 공은 생원으로 급제하여 형조도관정랑은풍현감전주판관이 되었다는 것이다세종조 말에 사간원 우정원으로 벼슬을 내놓고 물러나 쉬었다돌아가시매 횡성 갈풍 묘향 언덕에 장사지냈다()는 원주이씨 중랑장 반계의 녀이다묘는 같은 능선의 앞으로 예닐곱 걸음 떨어졌으며 묘혈(墓穴)은 바로 신()좌이다모두 작은 표가 있다공은 벼슬과 휘 그리고 正統 壬戌(1442 세종24)년 十月丁酉에 장사지냈다.고 기록하는데 그쳤다부인은 성씨와 宣德 乙卯(1435, 세종17八月 庚午에 장사지냈다고 기록하는데 그쳤다어떤 이는 공과 부인의 상()이 이 해에 있었던가 한다공의 아들 문정공의 책훈으로 공은 이조판서 원산군에 추증되었다아들 효연(孝然)은 판서 원성군(原城君)으로 곧 문정공이다효이(孝而)는 현감으로 참판에 추증되었으며효의(孝矣), 효재(孝哉)는 현감이다사위는 김영륜(金永輪), 사직(司直윤신손(尹信孫), 찰방 김석견(金石堅)이다손자와 증손 이하로 드러난 이는 맹수(孟襚)는 첨중추이며 중비(仲秠), 팽조(彭祖)는 모두 절도사이다계채(繼蔡)는 관찰사이고 계검(繼儉)은 판서이다()은 절도사이고충장공(忠壯公(), 부사 희()는 모두 왜난(倭難)에 순절하였다호섭(虎燮)은 응교이며호지(虎智)는 장령이고()은 절도사이며유남(裕男)은 원계군(原溪君)이고 성집(成集)은 동중추로 참판에 증직되었고성모(成模)는 오랑캐의 변란(虜變)에 절의를 지키며 죽었다()은 통제사이며 두표(斗杓)는 좌의정으로 부원군이다.

두추(斗樞)는 부윤이고 해일(海一)은 부사로 부정에 증직되었으며 승길(升吉)은 좌랑에 증직되었다이길(頤吉)은 그 부친 성모(成模)와 함께 죽어서 포증(褒贈)되었다()은 통제사이며만석(萬石)만리(萬里)는 모두 관찰사이고만춘(萬春)은 한성부 우윤(右尹)이다()은 첨중추이며 세()는 장령이다덕휘(德徽)는 통제사이고몽린(夢麟)은 흥평위(興平尉)이며성유(聖兪)는 부윤이고덕하(德夏)는 가선대부로 부사이다백규(百揆)는 절도사이며명규(命揆)는 동중추이고 필규(弼揆)는 지중추(知中樞), 경운(慶運)은 동중추명익(命益)은 도정(都正), 해익(海益)은 동중추경하(景夏)는 행 판서(行判書), 경순(景淳)은 판서경렴(景濂)은 참판중회(重會)는 절도사계영(啓英)은 사서(司書), 인손(仁孫)은 판서의손(義孫)은 대사간후진(厚鎭)은 부사이다.

   공은 한창인 때에 여러 벼슬을 거쳐 앞길이 바야흐로 열렸으나 하루아침에 짚신짝처럼 여기고 임천(林泉)에서 종신토록 후회하지 않았다그 뛰어난 식견과 밝은 지혜로 어찌 시대 상황의 기(幾微)를 미리 살펴 예견함이 아니겠는가부친의 능함이 아들에게 미쳐 봉작이 추증되고 드러나 빛나기를 10여 세에 이르렀다대를 거듭할수록 더욱 번창하고 벼슬이 서로 이었고 절의(節義)의 훈업과 왕비의빈(王妃儀嬪)이 내외의 여러 파에서 나왔다.

군자들은 공의 은덕(隱德)과 음공(陰功)이 후세의 사람(後人)에게 남긴 것이 그렇다. 공의 언행은 비록 상고할 수 없으나 공을 아는 사람들이 여기에 있는가? 옛 표()(비바람에)깎이고 떨어져[剝蝕] 돌아가신 공의 십대손 현감 일규(一揆)가 널리 살피고 실제의 사실을 기록하여 () 고쳐 세우려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지난 번 관서절도사 중회(重會), 호남안()사 인손(仁孫)이 봉금(俸金)을 내놓아 (墓碑) 새로이 하였다. 현감(一揆)의 아들 중건(重健)이 선대(先代)의 뜻을 (받들어서 그 끝을) 맺어 손수 가장을 짓고는 내게 명()을 지어 줄 것을 의탁하였다.

()에 이르기를,

속세를 떠나 은둔한 높은 풍도              遯世高風

후손을 위해 넉넉히 아름다운 덕행 끼치고 裕昆懿德

옛 묘명을 새로이 하니                       舊墓銘新

천고토록 갈라지지 말지어다.               千古不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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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덕상(宋德相)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숙함(叔咸), 호는 과암(果菴). 송시열(宋時烈)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교관 송무원(宋婺源)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53년(영조 29) 좌의정 이천보(李天輔)의 천거로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임명되었다.
 그 후, 자의(諮議)·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 등을 거쳐 1767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되었다.
  정조가 즉위한 뒤 홍국영(洪國榮)의 뒷받침으로 1776년 동부승지·이조참의·예조참의·한성부좌윤·좨주(祭酒) 등을 거쳐, 1779년(정조 3)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그러나 그 해 홍국영이 실각하자 삼수부(三水府)에 안치되었다.
  그 뒤 왕위계승에 대하여 올린 소에 흉역(凶逆)의 뜻이 있다 하여 옥에 갇히고 많은 유생의 공격을 받았다. 철저한 학문적 기반을 갖추지 못한 채 대학자의 후예로서 한때 세도세력에 힘입었으나 결국 함께 몰락하였으며, 노론벽파(老論辟派)로 몰려 죽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송덕상(宋德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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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곤(裕昆)은 《書經》 〈중훼지고(仲虺之誥)〉의 “의로 일을 바로잡고 예로 마음을 바로잡아 후세에 덕행을 남겨 주소서.〔以義制事 以禮制心 垂裕後昆〕”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