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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간공(휘 昊) 손자 정민공(휘 叔康)의 사초 필화 사건 내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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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종사연구 작성일21-06-10 17:24 조회27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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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I]ITKC_BT_0066A_0050_010_0330_2003_001_XML

기축년(1469, 예종 즉위 ) 4월에 비로소 세조실록(世祖實錄)을 수찬하는데, 지난 을해년(1455, 세조1) 이후로 춘추관(春秋館)의 직무를 띠었던 사람은 모두 사초(史草)를 납부하므로, 민수 또한 사초를 납부했었다. 그런데 이윽고 들으니, 사초에다 모두 본관(本官)과 이름을 다 쓰게 하였다. 그러자 민수가 대신(大臣)이 그 직서(直書)를 보고 미워하여 앙심을 품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은밀히 봉교 이인석(李仁錫) 및 첨정 최명손(崔命孫)에게 끼어넣지 말기를 청하고, 또 박사 강치성(康致誠)에게 요구하니 강치성이 그 사초를 빼내 주었다. 그러자 민수가 그 사초를 허둥지둥 고치어 미처 정사(淨寫)도 못한 채 돌려보냈다.

 

그런데 검열 양수사(楊守泗)최철관(崔哲寬)이 그 사초에 고치고 보충한 흔적이 있음을 보고는 이를 참의 이영은(李永垠)에게 보고하자, 이영은이 이 사실을 여러 당상(堂上)들에게 두루 고하니, 모두 말하기를 미세한 일이 아니다.” 하고 이에 상()에게 아뢰었던 것이다.

당초에 정언 원숙강(元叔康)이 아뢰기를 사초에 이름을 쓰는 것은 옛 제도가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직필(直筆)하는 자가 없을 듯하니 이름을 쓰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노하여 따르지 않았다.

이 때에 이르러 부정(副正) 김계창(金季昌)이 원숙강의 사초에도 고친 부분이 많다는 것을 고함으로써, 마침내 민수와 원숙강을 함께 의금부에 가두고 상이 그들을 친국하게 되었다. 이 때 민수가 말하기를 신이 쓴 것은 모두 대신의 일입니다. 그 대신들이 모두 실록각(實錄閣)에 있으므로 신은 신을 중상할까 염려되기 때문에 고치려고 꾀한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대성통곡하며 말하기를 신은 독자(獨子)이오니, 원컨대 목숨만 살려주소서.” 하니, 상이 그를 측은하게 여겨 이르기를 정직하도다. 내가 서연(書筵)에 있을 때에 민수의 사람됨을 알았었다.” 하고는, 마침내 사죄(死罪)를 면하여, 장일백(杖一百)을 쳐서 제주(濟州)의 관노(官奴)에 소속시켰다. 강치성은 처음에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았고 또 망녕되이 사인(舍人) 성숙지(成叔知)의 장()을 끌어들였다가 고문을 받고서야 자복하여 마침내 원숙강과 함께 처참(處斬)되었다. 최명손이인석은 알고도 고하지 않은 죄로 장일백을 맞고 본관(本貫)에 충군(充軍)되었다.


 출처 : [점필재집] 시집 권5, 구흥역에서 동년 민수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는 소식을 듣다[駒興驛聞閔同年粹流濟州]

   한국고전종합DB에 점필재집의 원문과 번역문이 실려 있으며, 그 번역문을 옮긴 것입니다. 점필재는 김종직의 이며, 그의 시문집이 바로 [佔畢齋集]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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