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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여수의 무신(武臣), 육영사업가 휘 세학(世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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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종사연구 작성일21-07-15 17:37 조회477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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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世學(1858. 12. 19.~ 1938. 11. 22.) 호 해은(海隱). 조선 말기 무신자선가육영사업가. 

24世 父 錫浩, 祖 在八 曾祖 以孫. 음성공 후 참판공파. 계사보 2459

7,8세의 어린 나이로 어른들과 시작(詩作)을 겨룰 정도의 신동(神童)이었다. 15세까지 향리(鄕里)인 여천군(麗川郡) 삼산면(三山面) 덕촌리(德村里) 서당에서 학문에 힘쓰는 한편 무예를 익히기도 하였다. 그해 큰 뜻을 품고 완도군(莞島郡) 청산도(靑山島)에 가서 훈장으로 17세까지 있다가 상경(上京),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수문장(守門將)에 제수되었다.

러일전쟁이 한창인 1904~ 5년 무렵엔 수문장으로 재임(在任) 중이었는데, 일본인들은 거문도(巨文島) 수월산(水越山)에 망루를 설치하고 이어 등대를 세우느라 도민(島民)의 적역(賊役)이 혹심하여 생업에 지장을 주기까지 하자 이를 시정케 하였으며, 1914년 거문도가 왕실 소유의 국유지로 편입될 위기에 처하자 동분서주한 끝에 계쟁지(係爭地)문제를 해결하여 주민들의 소유로 확정되었다.

1914년 한말 의병장 임병찬(林炳瓚) 의사가 거문도로 유배되었을 때, 임 의사의 신원을 보증하고 거문리에서 덕촌리 자기 집으로 거처를 옮겨 아동들에게 글을 가르치도록 했다. 1916년경에 일본 범선(帆船)이 고구마를 싣고 거문도에 입항하자 이를 전부 매수하여 종자(種子)로 쓰도록 집집마다 나누어 주어 초근목피의 신세를 면할 수 있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일합방 후에는 우국지사들을 자기 집에 숨겨 두고 거처케 하는 등 민족과 주민을 항시 염두에 두었으므로 그는 도민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1919년 제 5대 삼산면장(三山面長)으로 추대되어서는 1926년까지 면장의 직임(職任)을 맡아 주민 복리증진에 힘썼으며, 특히 1924년에는 전남의 직무 성적 우수자로 표창을 받기도 했다. 거문공립보통부설학교 덕촌초등학교(현 거문초등학교 덕촌분교, 1923417일 설립)세워 근대교육에 이바지하기도 하였다. 그가 설립한 덕촌국민학교(德村國民學校)에는 그의 공덕(功德)을 기리는 공적비(功績碑)가 서 있다. 공덕비가 세워진 주소는 전남 여수시 덕촌면 삼산리 461-9 이다.

비석의 내용은 전면(前面)碑題四字

전면(前面)에는 대자이행(大字二行) 세로로 새겨져 있는데, 첫 줄에는 武科及第 前 守門將元公, 그 좌측에는 世學愛民永世不忘碑로 모두 19이다.

(무과 급제하고 수문장을 지낸 원공 세학의 주민 사랑을 길이 잊지 않고자 세우는 비)

 중앙 비제(碑題)의 좌우에는 4字句가 4行씩 모두 32字의 詩句가 새겨져 있다.

  그 구절은 아래와 같다.

우측에 : 惟公才智 先我憂樂 臨機應愛 先人後己

좌측에 : 思完於密 功用之大 孰不被頻 咸曰是石

설립 시기 : 비의 좌측면에 辛酉 三月 日이라 새겨져 있다. 1921년으로 추정됩니다.

 

<역대인물종합정보 시스템>에 간략한 내용이 정리돼 있습니다.

* UCI : G002+AKS-KHF_13C6D0C138D559B1885X0


참고 자료

﹡ 『디지털 여수문화대전yeosu.grandculture.net

여수시사편찬위원회, 여수시사, 2010.

삼산면지 편찬위원회, 삼산면지, 1998.참고자료

여수여천향토지(麗水.麗川鄕土誌) 麗水·麗川鄕土誌編纂委員會 [編].1982.

댓글목록

종사연구님의 댓글

종사연구 작성일

근세의 자료라 해도 부지런히 정리하여 기록으로 남겨야 합니다. 이미 사라지고 알 수 없는 근세의 내용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하여 앞으로도 부지런히 근세의 자료들도 정리할 생각입니다. 물론 부지런히 찾고 더 많은 노력을 해야 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