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 내 전체검색

 

일가사랑방

[천예록] 41話 : 원만석(元萬石)의 혼령이 허적(許積)에게 간청한 이야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no_profile 종사와족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2-10-02 19:26 조회707회 댓글0건

본문

◈ [천예록天倪錄], 조선후기 임방任埅이 지은 야담집.

 

허적(許積)은 원주목사인 아우 질()에게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밤새 잠을 못자다가 새벽에 문득 꿈을 꾸었는데, 하인이 원() 참의(參議)가 문 밖에 와있다고 하여 그를 맞고 찾아온 까닭을 물었다. 그는 원주에서 선산(先山)으로 갔다가 상구(喪摳)를 이장하기 위해 다시 원주로 왔다며, 묘막(墓幕)에 미비한 것이 있고 일꾼도 모자라니 원주목사에게 편지를 좀 써달라고 하였다. 그 일을 왜 내게 청하는 지를 묻자 그는 자신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지라 원주목사를 찾아가면 놀랄 것을 염려하였다

 또 비록 내가 병중에 있으나 놀라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고, 선친과 함께 일을 한 지 오래이니 주선해 줄 것으로 생각하여 찾아왔노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이장을 하려는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자신은 뜻밖의 사고로 죽었고, 아우들이 괴이함을 이기지 못하여 장례를 치렀는데 장사지낸 자리가 불길한 곳이고 선친도 불안하게 여긴다는 말을 했다. 또 그는 풍수를 말하며 자신이 일찍 죽은 것이 묘 자리가 나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나는 또 일꾼이 많을 텐데 왜 부족하다고 하는 지 물었다.

  그 사람은, 먼 고을에서 굶주리던 사람들이라 차마 일을 독촉할 수 없는 사정을 이야기 했다. 그래서 나는 편지를 그가 가지고 갈 것인지, 아니면 여기서 전할 것인지를 또 물었더니 여기서 보내주길 원하였다. 나는 또 그가 죽은 자인데도 소복을 한 까닭을 물었더니, 선친의 혼령을 옮겨 모셨으므로 구천을 떠도는 몸이라도 근심스러운 마음에 소복을 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 물러가려는 그에게 담배 한 대를 권하자 그는 제 힘으로는 담뱃대를 들 수 없다고 하였다. 사람의 혼백은 기운만 빨아들일 뿐이라고 했다. 나는 그렇다면 어찌 혼백이 능히 침범하여 어지럽히고 변을 일으키는지 묻자, 그것은 귀신의 짓이지 사람의 신령이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내가 또 저승에 대하여 묻자, 그곳도 인간 세상과 다를 바가 없으며, 인간 세상에서 직위가 있던 사람이 저승에서 직위를 얻지 못한 경우는 없다고 했다. 내가 귀신의 이치를 묻자, 그는 나중에 알 일을 묻느냐며 웃었다. 내가 얼마나 살지를 물으려고 하는데 문득 놀라 꿈에서 깼다.

꿈에서 본 그의 옷차림, 얼굴 모습, 목소리 등 모두 역력하여, 과연 신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 것일까, 꿈을 깨고서도 의아하고 허망하였다. 장례를 치르는 일에는 미진한 폐단이 없어야 하는데 이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는 범상한 꿈이 아니어서 꿈속에서 주고받은 말을 상세히 할리니, 아우는 미비한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서 하나하나 시행하여 원 참의 뜻을 저버리지 말기를 바란다. 또 원참의의 장지가 어디인지, 만약 원주에서 장사지냈다면 더욱 기이한 일이니, 그를 장사 지낸 곳을 나중에 회답할 때 알려주기 바란다.

편지가 기이하여 베껴 전하는 사람이 있었다. 원참의는 원만석(元萬石)으로 재상 원두표(元斗杓)의 아들이다. 커서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이 참의에 이르렀다. 그 아우가 곧 만리(萬里) 만춘(萬春)이다. 원두표는 처음 ○○에 장례를 지냈는데 ○○년에 원주로 이장했다. 이때에 만석이 죽은 지 이미 오래되었고 그의 장지는 이미 원주에 있었다고 한다.

 

()

임방(任埅, 1640~1724) : 본관은 풍천(豐川), 는 대중(大仲), 호는 수촌(水村), 우졸옹(愚拙翁). 할아버지는 좌승지 임연(任兗)이고, 아버지는 평안도관찰사 임의백(任義伯)이며, 어머니는 상산김씨(商山金氏)로 김상(金商)의 딸이요,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의 문인(門人).

탄수공[휘 두표(斗杓)]께서는 1593(선조 26)癸巳 93일 생으로 1664甲辰 625일 돌아가셨으니 향년 72세이다. 그 해 728일 영평(永平, 즉 포천) 청계산(淸溪山) 사좌(巳坐)에 장사지냈다가, 3년 뒤인 1667(현종 8) 丁未 1020일 지금의 여주시 북내면 장암리(長岩里) 장산(長山) 선영(先塋)의 묘좌(卯坐)에 이장(移葬)하였다. 우리 가승에 실린 탄수공 가장(家狀) 참고.


원만석 자는 군옥(君玉), 호는 고산(孤山). 서울 출신. 수군절도사 충장공 원호(元豪)의 증손, 할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원유남(元裕男)이다. 아버지는 좌상 원두표(元斗杓)이며, 어머니는 사간 최동식(崔東式)의 따님이시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일찍이 부조(父祖)의 세력을 믿고 사람을 죽였다는 죄목으로 하옥된 바 있으나, 인조의 특명으로 방면되었다. 1649(인조 27)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에 기용되고, 1652(효종 3) 지평(持平정언(正言문학을 역임하였다.

 

1654년 세자시강원사서로 있을 때, 시폐 열가지를 상소하여 왕의 특별한 비답을 받았다. 이듬해 장령(掌令)이 되고 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을 거쳐, 1656년 경상도에 전대미문의 흉년이 들었을 때 왕명으로 진구어사(賑救御使)가 되어, 여러 지역을 순회하면서 민정을 보살피고 기민을 구제하여 은덕을 폈다.

 

그 해 헌납(獻納)을 지내고, 이듬해 동래부사가 되어 대마도주가 격식을 어기고 서계(書契)를 보내자 이를 시정하였다. 1658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전임 관찰사 오정원(吳挺垣) 때 도내에서 발생한 사당의 신주(神主)가 도둑맞은 일을 잘못 처분하여 추고(推考)의 처분을 받았다.

 

1662(현종 3) 병조참지가 되고 이듬해 좌부승지를 거쳐, 1664년 우승지에 올랐다. 성격이 쾌활하여 일을 처리함에 과단성이 있었고, 민정을 잘 살폈다. 한때 권력을 남용하였다는 반대세력의 비평을 받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명관으로 알려졌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용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