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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비문 병서(原文, 한글번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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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종사연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01-09 17:26 조회5,867회 댓글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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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贈諡) 지광국사(智光國師) 현묘지탑비명(玄妙之塔碑銘) (題額)

 

고려국 원주 법천사(法泉寺) 강진홍도 명료돈오 계정고묘응각 탐현도원 통제연오법동 구행료성도수융 소랑철 증시 지광국사현묘지탑비명과 아울러 서문

 

贈諡智光國師玄妙之塔碑銘(題額)

高麗國原州法泉寺講眞弘道明了頓悟戒正高妙應覺探玄道源通濟淵奧法棟具行了性䆃首融炤朗徹贈諡智光國師玄妙之塔碑銘 幷叙

 

중대부 문하시랑 동중서 문하평장사 판상서 예형부사 감수국사 겸 태자대부 상주국

(中大夫 門下侍郞 同中書 門下平章事 判尙書 禮刑部事 監修圀史 兼 太子大傅 上柱國)

 

() 정유산(鄭惟産)은 왕명(王命)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승봉랑(承奉郞) 상서도관(尙書都官)낭중(郞中)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은 신() 안민후(安民厚)14)는 칙선(勅宣)을 받들어 비문과 전액(篆額)을 쓰다.

 

()이 듣건대, 구담미(瞿曇彌)15)께서 묘음(妙音)을 부연(敷演)하시니 삼마지(三摩地)16)에 뻗쳤으며 소반도(蘇槃度)17)로써 고론(高論)을 성취하였다. 팔식(八識)18)의 근원을 궁구하고 알선하여 유식(唯識) 상응(相應)19)의 진종(眞宗)을 개창하였고 점차 널리 정교(政敎)를 현양(顯揚)하였으니, 이는 아상(我相)과 팔상(人相)을 벌유(筏喩)20)에서 경계하고 주재(主宰)21)와 궤지(軌持)22)를 나타내었다. 비록 지극한 이치는 허현(虛玄)에 그 근본을 두었으나 평등하여 차별이 없고, 모든 근기(根機)가 영리하고 어리석은 것을 말미암아 깨달음에도 천심(淺深)이 있으니, 우미(愚迷)한 중생을 급인(汲引)함에 있어서는 권실(權實)의 교리(敎理)23)를 지진(指陳)하였다.

점차 시간이 흘러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지 더욱 멀어져, 상법시대(像法時代)를 지나 말법기(末法期)에 접어들면서 부처님께서 남기신 유문(遺文)24)이 점점 무너졌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현장법사(玄奘法師)와 같은 스님25)이 상속(相續) 출세하여 아수라(阿修羅)의 굴()26)에 뛰어들어 권권복응(拳拳服膺)27) 하였으며, 보승(寶乘)을 돈독히 신봉하여 칼날 같은 변재28)로 널리 홍포(弘布)하였다. ()나라 때 번역한29) 경전들의 내용을 승습(承襲)하여 그 오묘한 이치를 터득하고 아울러 무너진 강령(綱領)30)을 떨쳤으며, 수역(隋譯)31)된 경전에 따라 그 심오(深奧)함을 끌어내었으니 이는 다 함께 끊어진 단추를 다시 이은 것이다.32) 동쪽으로 전래된 법()이 특이한 것이 아니니 내향자(內向者)의 마음이 그 마음 스스로 통달한 것뿐이다. 그러므로 간간이33) 헌걸한 괴웅(魁雄)34)이 출세하여 선현들의 자취를 밟아 무윤()35)이 되어 그 위명(威名)을 현겁(賢劫)36)에 떨치고, 계정(戒定) 등의 삼학(三學)을 범제(梵題)37)에서 연마하였다. 자씨(慈氏)의 신분이 양무제(梁武帝) 때 쌍림부대사(雙林傅大士)로 강림한 것을 본받았으며,38) 문수보살이 자취를 나투어39) 서주(西周) 목왕(穆王) 때 중국으로 불교를 전래한 것과 같다고40) 하겠다.

 

널리 동국(東國)인 인()을 교화하되 상(정시대(正時代)41)의 법()을 크게 홍포하고, 성조(聖祚)를 위해 정성껏 기도하며42) 임금을 도와 홍균(鴻均)43)을 이루게 한 스님은 오직 우리 국사(國師) 뿐이라 할 것이다. 스님의 휘는 해린(海麟), 자는 거룡(巨龍), 속성은 원씨(元氏), 어릴 때의 이름은 수몽(水夢)이었으며 원주(原州) 출신이다. 고조부와 증조부44) 때부터 선행을 쌓고 경사스러움을 행하였다. 희역(犧易)과 안정(安貞)의 인요(因繇)를 상고해 보건대,45) (((() 중의 회()로 말미암아 밝혔으며, 언승(彦升)이 검소하며 절약하였던 가풍(家風)을 지키고46) 그 순박한 바탕을 깨뜨리지 아니하였다.47) 할아버지의 휘는 길견(吉肩)48)이니, 마음은 서수(筮首)로 점을 쳤으며,49) 음양(陰陽)을 연구하여 상징을 나타내었으니50) 어찌 운수가 불길하게 변하는 것을 보고 구차하게 그를 면하려고 하였겠는가!51) 찬구(鑽龜)52)타와(打瓦)의 점을 쳐서 그로부터 얻은 조짐으로 의심하였던 운수를 예지하여 세상일로 하여금 미혹함이 없었다.53)

 

아버지의 휘는 휴()54)이니 관직은 아관(衙官)55)에 이르렀는데56), 모든 사람들이 선연(先掾)들보다 뛰어난 관리라고 칭송이 자자하였다.57) 일찍부터 훌륭한 상황(床喤)의 아들 낳기를 염원하여58) 항상 초연(椒衍)의 시() 듣기를 원하였다.59) 어머니는 이씨(李氏)니 영리함은 제호(提壺)60)에 계합하고 공손함은 거안(擧案)61)보다 더 얌전하였다. 끝없는 원력(願力)은 광목부인(光目婦人)62)과 같고 용모의 아름다움63)은 묘안(妙顔)64)임을 알 수 있다. 일찍이 성선(聖善)의 태몽에 하해(河海)의 물이 맑게 범렴(泛瀲)하고 정천(井泉)에서는 물이 솟아 올랐다. 이로 인하여 임신하고는 일과로 탄기(呑氣)65)를 행하여 태아를 교육하였다. 이에 미루어 보면 어찌 발자취를 밟고66) 잉태하여 태어난 강원(姜嫄)67)을 부러워하겠는가? 탁태(託胎)할 때에는 그윽히 왕소(王邵)68)의 경우와 같았다. 이미 만삭이 되어서는 드디어 그 상서(祥瑞)를 발()하였다. 옹희(雍熙) 원년(元年)69) 세재(歲在) 알봉군탄년(閼逢涒灘年)70) 도월(涂月)71) 그믐날 사제(私第)72)에서 탄생하였다.

 

어릴 때의 이름은 수몽(水夢)이었다. 옛날 중국에서 주()나라 명왕(明王) 24년에 강하(江河)와 천지(泉池)가 홀연히 범람하였으니,73) 이것이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상서(祥瑞)였는데, 이것을 우리 국사의 탄생과 비교하면 그 시종(始終)의 징조가 하나도 다름이 없다.74) 국사는 일자분정(日蔗分精),75) 즉 태양의 정기를 타고 났으며, 연꽃과 같은 향기롭고 아름다운 성품을 받아 태어났다.76) 의지는 탐애(貪愛)를 단제하는데 예리하였고77) 마음은 색신(色身)과 명예(名譽)를 위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78) 초년(齠年)의 나이에 이르러79) 이미 학문에 뜻을 두어 이수겸(李守謙)80)을 찾아가서 학업을 청하였다. 수겸(守謙)이 스님을 보고 특이한 그릇인줄 알고 말하기를, “나는 석학(碩學)이 될 기량(器量)81)을 지도할 능력이 없으니 너는 마땅히 밝은 스승을 찾도록 노력하라.” 하였다. 어느 날 관상을 잘 보는 한 노인이 있어82) 스님의 손금을 보고83) 국사에게 이르기를, “네가 만약 출가하여 스님이 된다면 반드시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 앞으로 통인달사(通人達士)가 되리라는 말을 듣고84) 다만 도주(道籌)에 종사할 생각에만 골똘히 잠기고85)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에는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노장(老莊)의 개설(槪說)에 대해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86) 따라서 사대부들의 헌면(軒冕)87)을 치수(錙銖)88)처럼 보고 고량진미(膏粱珍味)를 마치 강비(糠秕)89)와 같이 여겼다.

급히 서둘러 법고사(法皐寺)90)의 관웅대사(寬雄大師)의 처소로 가서 수학하던 중 관웅(寬雄)스님이 경화(京華)인 개성으로 떠났으므로 국사도 그 산중(山中)91)을 하직하고 떠나게 되었다. 관웅대사가 배를 타고92) 강을 건너 오운산(五雲山)93)을 벗어나자마자 스님은 곧 걸망을 짊어지고 따라갔다. 천리를 멀리 여기지 않고 함께 연하(輦下)94)로 돌아갔다. 이어 곧 산의 서쪽을 점지(占地)하였는데95) 해안사(海安寺)96)와 선접(旋接)한 곳이었다. 준광방장(俊光方丈)97)에게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 수도(修道)하면서 함장(函杖)에게 욕의(縟儀)를 펴고 시봉하기를 희망하며98) 정성을 다하여 표질(縹帙)을 관화(貫花)에서 연마하였다.99) ()나라의 창서(蒼舒)가 코끼리의 무게를 작은 저울로 알아 내던 나이에100) 이미 불교를 전해 듣고 알았으며,101) 가위나국(迦衛羅國)102) 구오사미(驅烏沙彌)103)의 류()와 같은 어린 나이에 이미 모든 사람들이 김공(金公)104)이라 존칭하였다. 그는 기연(機緣)을 검괄(檢括)105)하여 종요(宗要)106)를 격양(激揚)하되, 한 가지를 들으면 천 가지를 깨달아 진도(進度)의 결과가 그의 엄사(嚴師)107)보다 배()나 높았다.

 

양지(兩智)108)와 삼명(三明)109)으로 도덕이 높아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계승하였다.110) 이와 같이 영특함을 알게 된 웅공(雄公)111)은 기꺼워하면서 해린(海潾 : 의 오자)이라 이름을 지어 주었다. 통화(統和) 17112) 수하(首夏)의 달113)에 용흥사114) 관단(官壇)에서 구족계를 품수(稟受)하였다. ··치의 마음을 씻어 그 오염(汚染)을 여의었으니 마치 손으로 공중(空中)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았다. 29살 때 숭교사(崇敎寺)115)를 창건할 때 감독을 맡았던 은공(恩功)으로 그 절의 초대(初代) 주지가 되었다.116) 자운사(慈雲寺)117)에서 거행하는 창살도량(唱薩道場)에 나아가서118) 부처님께 향을 올려 기도하였다.119) 어느 날 관웅(寬雄) 스님이 법천사(法泉寺)에서 잠을 자고 있는 동안 꿈에 새매 한 마리가 날아오는 것을 보고 왼쪽 손을 펴서 손바닥에 받들었다. 또 두 마리의 산군(山君)120)이 절 후원(後園)에 들어와서 서로 뛰고 놀다가 날이 밝아지자121) 떠나간 일도 있었다. 관웅(寬雄) 스님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기억하고 있었는데, 다음 날122) 국사께서 본사(本寺)를 찾아왔으니123) 이것이 바로 그 꿈의 감응(感應)인 것이다. 또 어느 날 꿈에 바닷가에 가서 손으로 직접 작은 고기를 잡아서 삼키고 꿈을 깨었는데, 해몽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는 비늘()을 뜻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을 린()으로 고쳐 해린(海麟)을 해린(海鱗)으로 개명(改名)하고, ()를 거룡(巨龍)이라 하였던 것이다.

 

나이 21세 때 왕륜사(王輪寺)124) 대선장(大選場)125)에 나아가서 담경(談經) 시험을 보았는데, 그의 말은 평범하나 그 뜻은 매우 심오하였다.126) 시험의 문제는 같았으나 국사의 답안은 다른 사람들보다 특이하였다.127) 저들 자신의 답안이 틀려서 자신의 소망에 어긋난 자들은128 마치 소경이 촛불을 잡은 것과 같았으며, 혹은 시기하여 머트럽게 다투던 자들은 마치 함장(銜杖)129)한 것과 같이 입을 열지 못하였다. 마음에는 모든 반연을 쉬었으니 감히 파도가 물에 의지한 것을 탄식할 것이며, 진여법(眞如法)은 모든 움직임을 여의었으니 마땅히 탁약(槖籥)130)의 가풍(假風)을 비웃을 수 있겠는가.131) 토의하는 광장(廣場)에서는 주위로부터 집중적인 공세를 받았으나 마치 교범파제(憍梵婆提 : gavāṃpati) 등의 호부장자(豪富長者)들로 구성된 그룹의 첩벽(疊壁)이 무너지고 모두 논리에 강복(降伏)하고 부처님께로 귀화한 것과 같았으며132) 견고한 인욕의 갑옷이여!133) 니건자(尼乾子)를 비롯한 외도(外道) 육사(六師)들의 일(((() 등의 교란적인 주장이 부처님 사자후(獅子吼)의 일성으로 말미암아 모두 사라진 것과 같았다.134)

 

국사께서 법상(法床)에 앉아 불자(拂子)를 잡고 좌우로 한번 휘두르니135) 가히 청중들이 많이 모여 앉은 걸상이 부러진 것과 같았다.136) 임금이 국사의 도덕을 찬양하고137) 대덕(大德)의 법계를 서증(署贈)하였다.138) 이 때 스님께서 이르기를, “내가 의룡(義龍)과 서성(瑞聖)인 후배에 게는 부끄럽지만139) 인수(仁獸) 보다는 앞서기를 기대하므로140) 인자(麟字)를 인()으로 이름을 고치겠다.”고 하였다. 통화년중(統和年中)141)강진홍도(講眞弘道)”란 법호를 받았으며, 28142)에는 국사께서 법고사(法皐寺)로 돌아가는 길에 도강(都講)143)인 진조(眞肇) 스님을 만나 동행144)하다가 진조(眞肇) 스님이 역산(曆算)145)하는 법을 잘 안다는 말을 듣고 국사께서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는데, 누구나 이를 취하려 하면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쉽고,146) 도모하여 옮기면 밝아서 소경이 눈을 뜬 것과 같이 여용(餘勇)147)을 보통 무리들에게나 끼쳐주며,148)다능(多能)을 비루(鄙陋)149)한 것을 연구함과 같았다. 통목화(統木禾)150) 말년은 우리 성고(聖考)151) 현종(顯宗)께서 보위에 오르신지 5년째 되던 해이다.152) 특히 현종 임금으로부터 존장(尊獎)하는 은총을 입어153) 대사(大師)의 법계를 받았다.154) 대중상부(大中祥符) 10155)에는 명료돈오(明了頓悟)’란 법호를 증사(贈賜)받았고,156) 천희(天禧) 5157) 호경(鎬京)158) 중흥사(重興寺)159)에서 여름 결제(結制) 중에 강경법회가 있었는데, 국사께서 법을 설하시니, 그 법의 혜택이 화택 중생들에게 두루 미쳐 마치 새벽 기온처럼 청량(淸凉)하게 만들어 주었다.160) 자비의 등불을 혼구(昏衢)의 밤거리에 비추어 축건(竺乾)의 서래밀지(西來密旨)를 깨닫게 하였다.161) 국사가 매일 한 번씩 기자(箕子)162)의 고도(古都)163)를 일컬으면 대중은 세 번씩 창송하였다. 그 후 기숙(耆宿)164)인 선공(先公)의 사회사소(社會詞疏)165)가 문리(文理)가 맞지 아니함을 보고 고쳐 지어주면서 (결락) (). 지만적(枝蔓的)인 부사(浮辭)는 잘라 버렸다.166) 스님은 아무렇게나 말을 하여도 곧 훌륭한 문장을 이루게 되었으니,167) 혜거(惠璩)168)의 문장력도 혼비백산하였고,169) 문장을 나누면 척척 음운에 부합하였으니170) 담빙(曇憑)171)의 음운학(音韻學)의 실력도 부끄러워할 정도였다.172) 뿐만 아니라 그의 주연(遒姸)173)하고 민첩함을 누가 능히 그를 적대(的對)할 수 있겠는가!174) 태평년중(太平年中)175)에 중대사(重大師)의 법계를 진정(進呈)하고 아울러 계정고묘응각(戒正高妙應覺)’이란 법호를 올리고는 수다사(水多寺)176)를 맡도록 하였다. 태평(太平) 10177)에 이르러 현종이 칙명으로 해안사(海安寺)178)로 이주하도록 앙청(仰請)하였다. 그 후 덕종(悳宗)179)이 즉위하여서는 보다 더욱 존중히 모시는 한편 특별히 삼중대사(三重大師)의 법호를 수정(授呈)하고 아울러 마납(磨衲)으로 만든 법복 한 벌을 증사(贈賜)하였으며, ‘탐현도원(‘探玄道源)’이라는 법칭(法稱)을 첨가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않아 수좌(首座)의 법호를 올리고 겸하여 마납(磨衲) 복전의(福田衣)180) 한 상자181)를 하사하였다. (결락) 자심(滋深)하거늘182) 어찌 우물안 개구리가 바다의 깊음를 측량할 수 있겠는가. 치류(緇流)183)들이 환희심에 넘친 마름으로 경하(慶賀)하여184) 하연(廈燕)이 투서(投棲)함을 경멸히 여겼으니,185) 지광국사(智光國師)는 마치 각왕(覺王)의 출세가 아닌가 하여 의심할 정도였다.186) 다행히 인주(仁主)187)와 동시에 출세하여 그의

법음(法音)은 마치 바다를 덮을 정도로 해조음(海潮音)188)과 같으며, 현하(懸河)와 같은 변재189)는 그 도도하며 민첩함을 이루 다 형언할 수가 없다.

 

중희년중(重熙年中)190)통제연오법동(‘通濟淵奧法棟)’이라는 법호를 가상(加上)하였다. 갑자기 어느 날 선조(宣詔)를 보내 궁내로 영입하여191)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연설토록 하였다.192) 국사는 궁중의 높은 섬돌193)을 밟고194) 예상(猊床)인 법상에 올라 앉아 법우(法雨)를 내려주어 진리를 표하고 정법(正法)을 나타내었다.195) 우거(牛車)에 따른 오지(奧旨)의 관기(關箕)를 활짝 열어196) 무명인 혹()을 전제(剪除)하고 의문(疑問)의 구름을 휘산(揮散)하였다.197) 맹구우목(盲龜遇木)198)과 같이 만나기 어려운 묘법(妙法)을 들은 임금은 마음에 크게 감동하였으니,199) 어찌 귀중한 보배와 사사공양(四事供養)을 하사하는데 인색하였겠는가!200) 특별히 가는 실로 수를 놓은 당상복(幢相服)201) 두 벌을 하사하였다. 14202)에는 발탁하여 승통(僧統)의 법계를 올렸다. 지금의 임금203)이신 문종이 즉위하여 하()나라의 정통을 계승하여 국민에 임()하였으며,204) 마치 주()나라의 무왕(武王)이 은()나라의 폭군 주왕(紂王)을 견제(甄除)하고 인정(仁政)을 펴서205) 홍업(洪業)은 이미 의삭(懿鑠)206)에 이르렀으며, 약성(瀹誠)207)은 나마(那摩)208)에 간절하였다. 왕이 국사를 임궁(琳宮)209)으로 초빙하여 유심(唯心)에 대한 묘의(妙義)210)를 강설케 하고는 마납(磨衲) 비단으로 만든 승가리(僧伽梨) 한 벌을 하사하였다.

 

궁중(宮中)211)의 구중(九重)212)에서 부의(負扆)213)하고 있는 임금께서 친히 상보(象步)214)하는 용상대덕(龍象大德) 스님들을 영접한 백고좌(百高座)는 모두 용문(龍門)을 뛰어넘는 오도견성(悟道見性)한 도인들이었다.215) 담수(曇邃) 스님은 북좌(北座)에서 정통(精通)하였음을 부끄러워했고,216) 승철대사(僧徹大師)는 편독(篇牘)과 시부(詩賦)에 뛰어나 낙필성장(落筆成章)하는 문호(文豪)이므로217) 많은 대덕(大德)들을 제치고 왕으로부터 총석(寵錫)218)받은 것을 사양할 정도였다. 그리고 중희년중(重熙年中)219)에 거듭 다시 구행료성도수(具行了性導首)’라는 법호를 첨가(添加)받았다.220) 또 기원(祇園)의 적손(嫡孫)이니 이는 오직 불교가 중흥할 인유(因由)인 것이다. 척리(戚里)221)의 신동(神童)들이 예문(禮聞)을 거치지 아니하고 와서 수학하였다.

 

이로써 작고(作故)하신 수대사(守大師)의 문하시중(門下侍中)이며 중서령(中書令)을 추증(追贈) 받은 장사공(章私公) 이씨(李氏)의 휘는 자연(子淵)222)이니, 드디어 다섯째 아들을 허락하여 그로 하여금 낙발(落髮)223)하고 정성을 다하여 국사에게 구의(摳衣)하고224) 신족(神足)225)이 되어 복근(服勤)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리하여 국사가 직접 찾아가서 친견하고 찬앙(讚仰)하였으니, 그 분이 누구인가? 지금의 금산사(金山寺) 주지로 있는 삼중대사(三重大師)인 소현(韶顯)226)이 바로 그 스님이다. 국사는 부모를 하직하고 속가를 떠나 입산(入山)하였다.227) 음식을 항상 절제하여228) 묘재(卯齋)229)인 아침 공양만 먹었다. 초액(椒掖)230)의 후비(后妃)를 살펴 보건대 모두가231) 동기(同氣)이며,232) 악루(萼樓)233)의 형제들은 함께 외손(外孫)인 것이다.

 

이 사람은 도()의 극치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234) 유교와 불교를 두루 통달하여 그와 대등한 자가 없었다.235) 덕행(德行)과 문장(文章)이 노당(魯堂)236)의 십철(十哲)237)을 크게 엄압(掩壓)하였고 자비와 지혜는 위사(魏寺)의 천승(千僧)238)보다 훨씬 초월하였다. 자질(資質)은 현반(玄班)을 크게 높혔고,239) 법력(法力)은 온 세상의 중생을 부호(扶護)할 만 하였다.240) 국사의 문하(門下)가 왕성하고 장려(壯麗)함이 스님보다 더 큰 스님은 없었다.241) 중희(重熙) 23242) 남녀월(南呂月)243)에 성칙(聖勅)244)을 내려 현화사(玄化寺)245)로 이석(移錫)케 하므로 국사는 고사하였으나 하는 수 없이 마침내 허락하였다. 임금께서 유마(騮馬)246) 일필(一匹)을 이에 앞서 절에 희사(喜捨)하였다. 갑자기 한 비구가 와서 말을 희사한 데 대해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는 잠시 후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어 간 곳을 알지 못하였으니 이는 문수(文殊)의 화현(化現)인 성승(聖僧)247)의 영험인 것이다. 현화사(玄化寺)에 입사(入寺)한 후 어느 날 후야분(後夜分)248) 혼허(魂栩)249)할 무렵, 한 스님과 같이 있었는데, 그 곁에 신인(神人)이 서서 말하기를, “너는 국사(國師)이고,250) 저는 왕사(王師)이다.”라고 하였다.251) 잠을 깨었으나, 그가 말한 소리는 아직도 귀에 역력하였다.

 

아름다운 징조이며252) 특별한 서록(瑞錄)253)이라 칭송되어 길음(吉音)254)이 환구(環區)인 온 세상에 가득 하였거든,255) 하물며 국사가 어찌 내종(內宗)256)에만 편국(偏局)하였겠는가! 또한 외전(外典)도 두루 겸통(兼通)하였다.257) 날 때부터 이미 여러 가지 묘법(妙法)을 알았을 뿐 아니라,258) 숙령(夙齡)259)의 어린 나이에 주발(朱勃)260)과 같은 천재를 업신여길 정도의 재동(才童)이었다.261) 아주 많은 서적을 독파하였으므로262) 당시 사람들이 혜초(惠超) 스님을 능가하였다고 칭송이 자자하였다.263) 학사(學士)264) 뿐만 아니라,265) 사봉(詞峯)266)은 태양을 의지하며 필총(筆塚)267)은 하늘을 받들었다. 경구(警句)를 독실하게 공부하여268) 거유(鉅儒)로써의 과문(寡聞)한 이에게 영향을 입혔다.269) 화탕(和湯)270)한 개사(開士)271)가 벽운시(碧雲詩)272)의 아작(雅作)을 읊었으니, 이것이 어찌 괴기(瓌奇)273)한 명문(名文)이 아니겠는가! 이에 비하면 이적선(李謫仙)274)의 백설시(白雪詩)275)의 청음(淸吟)도 진실로 쇄미276)한 졸작이라 할 것이다. 치소(緇素)의 무리들과 비교하더라도 또한 동년(同年) 선상(線上)에 두고 말할 수 없다. 혹은 유교와 불교를 기빙(期憑)277), 즉 비교해 보건대, 범복(梵福)278)이 더욱 수승하였다.

 

신도(宸圖)279)께서 정재(淨財)를 기울여 현화사(玄化寺)의 보수공사에 필요한 공사비를 국가에서 부담하도록 하였다.280) 그리고 개필(愷筆)281)을 불러 수용(睟容)282)의 탱화를 그리고 한편으로는 부종(鳧鍾)283)을 주조하며, 일체법구(一切法具)를 마련하였다. 이와 같이 보수한 보찰(寶刹)이 그 장려함이 마치 도사다(覩史多)284)의 천궁(天宮)을 옮겨 놓은 것과 같았다. 금언(金言)인 경전을 판각(板刻)하여285) ((()인 구나(拘那)286)의 용궁해장(龍宮海藏)을 담았으니 이것이 이른 바 시단(始檀)287)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사홍서원(四弘誓願)을 일으켜 마침내 원만하게 성취하고,288) 임금이 지광국사(智光國師)를 스승으로 모시고 사자(師資)의 큰 인연을 맺었다.289) 이와 같이 모든 악()은 짓지 아니하는 한편 여러 가지의 선()한 일을 봉행(奉行)한 일들을 어찌 이루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290) 청녕(淸寧) 2291) 1월 일에 임금께서 이르기를, “대붕새도 늙어지면292) ()이 아니면 그 미혹(迷惑)함을 구제할 수 없고 성스러운 병아리293)라도 스승이 아니면 법익(法益)을 청()할 수 없다.”고 하였다. 진실로 능히 법()을 깨달은 이라야 가히 스승이 될 수 있다.

 

특별히 국서(國書)294)를 보내 초청하였다. 드디어 공부시랑(工部侍郞) 장중영(張仲英),295) 상서(尙書) 좌승(左丞) 유신(柳紳)296)과 예부시랑(禮部侍郞) 김량지(金良贄)297) 등을 보내되, 세 번이나 되풀이하는 삼반(三反)의 예()298)를 갖추고는, 이어 다시 중추원사(中樞院事) 이유충(異惟忠)299)을 보내어 왕이 수결(手結)하고 압인(押印)한 편지와 함께 금계법복(錦罽法服)과 은(), 황유(黃鍮)로 만든 기물(器物)300)과 향천(香荈)301) 등을 보냈다. 국사는 굳게 사양하였으나 마침내 왕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302) 그리하여 그 해 114일 대가(大駕)303)가 내제석원(內帝釋院)으로 행행(行幸)304)하여 예배(禮拜)를 갖추어 왕사(王師)로 추대하였다. 그 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어가(御駕)에 동재(同載)305)하고 다녔으니, 마치 강승회(康僧會) 스님이 오왕(吳王) 손권(孫權)의 어가(御駕)에 동승하고 다녔던 것306)은 모두 스님의 하풍(下風)307)에 있었기 때문이다. 청녕(淸寧) 3년에 이르러 융소(融炤)’라는 법칭(法稱)을 진정(進呈)하였다. 45월 초하루에 임금께서 스님을 국사(國師)로 책봉코자 하여308) 친서를 보내 삼청(三請)하였다.

 

그리하여 그 달 19일 왕이 금가(金駕)309)를 준비해 봉은사(奉恩寺)310)로 행행(幸行)하여 우리 해린(海鱗) 스님을 국사로 봉하고, 영통사(靈通寺)의 주승(主僧)인 난원(爛圓) 스님311)을 왕사(王師)로 책봉하였다. 연진(涓辰)312)을 택하여 아울러 위대한 칭호(稱號)313)인 법칭(法稱)을 봉정(奉呈)하였으니, 양상(兩相)314)이 부합되었다. 같은 날에 두 스님이 함께 지총(摯寵)315)을 받았으므로 이미(二美) 316)가 동시에 나타난 것이다.

 

그 까닭을 살펴보니 미증유(未曾有)의 희유(希有)한 일이라고 찬탄하고도 남음이 있다. 전일의 꿈에 신인(神人)너는 국사(國師)이고 저는 왕사(王師)이다.”라고 한 예언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때 꿈에 동유(同遊)하던 스님은 영통사(靈通寺)의 주지317)인 난원(爛圓)이 바로 그 스님이다. 5318) 양월(陽月)319) 8일 국사께서 왕궁 내전(內殿)에 나아가서 백고좌회(百高座會)320)의 제일설법주(第一說法主)321)가 되었다. 겨우 반게송(半偈頌)을 설하자마자322) 청법대중이 사방(四方)으로부터 거듭거듭 모여들어 큰 성왕(盛旺)의 상서를 나타냈다.323) 왕이 다시 낭철(朗徹)’이라는 법칭(法稱)을 진정(進呈)하였다. 함옹(咸雍) 3324) 2월 일에 국사께서 법천사(法泉寺)에 돌아가 안주(安住)코자 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모치(暮齒)325)의 탄식을 일으키며, 누차 임금께 사퇴(辭退)할 것을 고진(告陳)하여326) 세 번이나 거듭 수두(需頭)327)의 주청(奏請)을 올려 간절한 사의(辭意)가 확고함을 알렸다.328) 문종은 하는 수없이 윤허(允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해 922일 왕이 현화사(玄化寺)에 행행(幸行)하여 합원승재(闔院僧齋)329)를 베풀고 겸하여 국사를 석별하는 인전연(寅餞筵)330)도 마쳤다. 임금은 양반의 관솔(官率)을 거느리고 국사에게 하직 인사를 한 다음,331) 좌승선(左承宣)이며 중서사인(中書舍人)인 정유산(鄭惟産)332)을 파견하여 수결(手結)을 찍은 조서(調書)와 차(), (), 보화(珤貨) 등을 정상(呈上)하였는데,333) 그 이름과 수가 너무 많아 산제(刪除)하고 싣지 않는다. 국사는 이 달 27일 출발하여 본산(本山)인 법천사(法泉寺)로 떠났다.

 

임금이 태자(太子)에게 명하여 제왕백료(諸王百僚)를 거느리고 남교(南郊)334)까지 가서 전별(錢別)케하고 특별히 도속(道俗)의 관원(官員)335)을 보내어 본사(本寺)까지 호송(護送)토록 하였다.

국사께서 본산(本山)인 법천사(法泉寺)에 돌아간 후, 3년 만인 중하지월(仲夏之月)336)에 성상(聖上) 337)이 연덕궁(延德宮)의 제6왕자338)로서 체발(剃髮)하고 스님이 되어 현화사(玄化寺)에있게 하였다. 이전에는 봉천원(奉天院)에 주석하다가 특히 수좌(首座)의 법계를 증수(贈授)받았으니, 이는 국사의 주변에 있으면서 깊은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339) 이 해 10340) 23일 편안히341) 우협(右脇)으로 누워 취침하였다. 이날 밤에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렸다.342) 국사께서 잠을 깨어 가부좌(跏趺坐)를 맺고 앉아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결락) 바깥 날씨가 어떤가?”하니 대답하기를, “이슬비가 내리고 있읍니다.”라는 대답을 듣고서 곧 입적하였다. 옛적 추자(鶖子)343)가 입적(入寂)함에 당하여 무색계(無色界)의 제천(諸天)344)이 흘린 바 눈물이 마치 봄에 내리는 이슬비와 같았으니,345) 지금 국사께서 시화(示化)하던 오늘밤에 내린 비인들 어찌 제천(諸天)이 흘린 눈물이 아니겠는가.

오호 애재(哀哉)! 세수는 87세요, 승랍은 72세였다. 입적(入寂)하던 전날 밤에346) 등불만한 크기의 두개의 별이 나타났고,347) 또 두 줄기의 큰 무지개가 섰는데, 마치 두마리의 적룡(赤龍)이 나란히 누워 있는 것과 같았다. 이것은 (결락) 국사께서 입적(入滅)하실 조짐을 보인 것이다.348) 문인(門人) 수좌(首座)인 법령(法靈)과 삼중대사(三重大師)인 소현(韶顯)349) 등이 가슴을 치며 발을 구르면서 부음(訃音)을 동폐(彤陛)350)에 주문(奏聞)하였다. 부음을 들은 문종(文宗)은 크게 진도(震悼)하시고 곧 좌가승록(左街僧錄)인 숭연(崇演)과 보장정(保章正)351)인전삼린(全參藺)352) 등을 파견하여 장사(葬事)를 감호하도록 하였으며, 이어 전개(專介)353)인 특사를 보내서 빈당(殯堂)354)에 가서 조문토록 하되 정중한 탁제(卓祭)355)를 치르도록 하는 한편, ‘지광(智光)’이라는 시호를 증정(贈呈)하고 아울러 다향(茶香)과 유촉(油燭)을 하사하였으며, 또 원주(原州) 창고에 있는 양곡으로써 발천위락(拔薦爲樂)356)의 법요식(法要式)에 필요한 경비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19일 법천사(法泉寺)의 명봉산(鳴鳳山) 동쪽 승지(勝地)를 선택하여357) 다비(茶毗)358)의 예를 거행하였다. 이 때 인간과 영기(靈祇)가 비통하며 슬퍼하고, 천지(天地)가 캄캄하며 새·짐승들은 슬피 울고, 봉만(峰巒)은 처참하게 나열(羅列)되었으니, 유정(有情)과 무정(無情) 등이 모두 국사의 도덕이 끝남에 대하여 슬퍼한 것인저!359)

임금께서 아름다운 궤범(軌範)을 추모하여 감히 제액(題額)을 표()하지는 못하지만, 황견유부(黃絹幼婦)360)인 절묘호사(絶妙好辭)의 명문(名文)을 새겨 정민(貞珉)361)을 세워 국사의 위적(偉跡)이 영원히 썩지 않게 함이다. 적자(赤髭)362)와 같은 위대한 행적을 빛나게 할 뿐 아니라 역대(歷代)에 유전되어 영원히 남아 있게 하고자 하여, 이에 추유(鯫儒)363)에게 명하시어 국사의 홍대(鴻大)하고 탁렬(卓烈)한 위업을 밝히라고 하셨다.364) 그러나 신()의 식견(識見)은 우잠(牛涔)365)으로 토해(兎海) 366)의 물을 측량하는 것과 같아서 불가능한 일이라고 사양하였지만 어찌 할 수 없었다. 그릇 윤선(綸宣)을 받드는 것은367) 도저히 더 이상 사양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368) 그러므로 국사의 가풍(家風)에 따라 그의 도덕을 기록하였다. 비록 견고하나 돌과 같이 궁구는 마음은 아니며369) 학문은 부수(膚受)이고 재조(才操)는 졸재(拙才)이다. 스스로 수중에는 한푼의 돈도 없음을 부끄러워하면서도370) 문득 광비(狂斐)371)의 명문(名文)을 지으려고 다만 최선의 노력을 다할 뿐이다. 삼가 이상의 탁적(卓跡)을 명()으로 칭송(稱頌)하노라.

 

무상심심(無上甚深) 미묘법(微妙法)은 석가(釋迦)가 시조(始祖)!

사십구년(四十九年) 고구정녕(苦口叮寧) ()하신 내용

서건(西乾)에서 시작하여 천년후에야

가엽축법(迦葉竺法) 두스님이 동전(東傳)하였네!

일체법장(一切法藏) 진속(眞俗)으로 갈라졌으니372)

근기(根機)따라 설법하신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한 중생(衆生) 제도코자 정법(正法)을 보여

실상법(實相法)을 기본(基本)하고 권법(權法) 설했네! (其一)

무상대교(無上大敎) 그 진리를 널리 펴시니

십이부류(十二部類) 중생들이 서열(胥悅)373)하도다.

자성천(自性天)의 혜일광명(慧日光明) 두루 비추니

언덕마다 골짝마다 밝아졌었네!

자비하신 구름으로 윤택케 하되

쑥과 난초(蘭草) 차별 없이 적셔주었다374)

불타(佛陀)께서 열반하신 시대가 멀어

 

남겨주신 그 유풍(遺風)이 멸절(滅絶)해 가네! (其二)

이심전심(以心傳心) 그 혜명(慧命)을 누가 이을까?

지광(智光)국사 스님 만이 감당할걸세.375)

여러 생()에 혁기(赫氣)모아 태어났으니376)

단적(端的)으로 밝은 시대 만났도다.377)

양친부모(兩親父母) 하직하고 애정(愛情)을 끊어

속가(俗家) 옷인 소의(素衣) 벗고 치의(緇衣)를 입다.

고상함은 석림중(釋林中)에 악봉(萼鳳)이시고378)

신령(神靈)함은 상서로운 시귀(蓍龜)와 같네!379) (其三)

지극하신 정성으로 발심(發心)하였고

입으로는 발원(發願)하고 반야(般若)를 닦았다.

안으로는 팔만장경(八萬藏經) 연구하면서380)

밖으로는 유교(儒敎)사상 공부하였다.381)

품계(品階)로는 삼현(三賢)아닌 십지(十地)이시고382)

거룩하신 그 칭송(稱頌)은 천하에 떨쳐

()과 지혜(智慧) 함께 구족(具足) 양족(兩足)하시어383)

일체세간(一切世間) 살펴봐도 견줄 자 없네!384) (其四)

계현논사(戒賢論師)385) 화현(化賢)으로 다시 오신 듯

무착보살(無着菩薩)386) 도생위(度生爲)해 거듭 나투다.

반야덕(般若德)의 병() 속에는 진리 가득히

거울같이 밝은 마음 더욱 밝도다.

모든 상문(桑門)387) 수행자(修行者)엔 표본이 되고

예달(蘂闥)388)까지 그 이름이 가득하였다.

요황(瑤皇)389)께서 초빙하여 법문(法門) 들었고

보세(寶世)390)에는 수도대중(修道大衆) 번영하였다. (其五)

스님께선 덕이 높아 국사(國師)되셨고391)

모든 일은 평범하게 처리하였다.

자나깨나 국민 위한 일념(一念) 뿐이며

영원토록 큰 원력(願力)을 굳게 가지다.

세상만사392) 모든 것은 점위(阽危)393)한 것 뿐.

환봉(圜封)속에 갇히어서 이미 늙었네!394)

여산(廬山)395)같은 본산(本山)으로 되돌아가서

정진(精進)하고 기도하여 고년(高年)을 바라네. (其六)

몸은 비록 건강하여 새지 않지만396)

이 생명은 멀지않아 끝날 것일새

아름다운 제호(醍醐) 맛도 맛을 잃었고

향기롭던 담복향(薝蔔香)도 향기가 없네!

대소관원(大小官員) 전재(筌宰)397)들은 여탄(茹歎)398)하였고

오장육부(五臟六腑) 오려내듯 슬퍼하였다.

여이(黎夷)399)들도 너나 없이 애통함이여400)!

부모401)잃은 아이처럼 통곡하도다. (其七)

슬퍼하는 제자402)들은 봉둔(蜂屯)403)과 같고

그 유언에 감동함은 적자(赤子)와 같네!404)

북수(北首)하고 입적(入寂)하니 세우(細雨) 내리고405)

()을 향해 비를 세워 표본(標本)을 삼아406)

바닷물을 막으려는 짧은 지혜(智慧)407)

새사람이 나타난들 고인(故人) 당할까?408)

맑은 덕과 그 웅명(雄名)은 위업(偉業) 보인 것409)

미래제(未來際)가 다하도록 영원하소서.410) (其八)

비서성(秘書省)411) 배융교위(陪戎校尉)412) () 이영보(李英輔)413)와 대장(大匠)414)장자춘

(張子春)415) 등은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새기다.

 

裏面

() 법천사주(法泉寺主) 지광국사(智光圀師)의 비명음기(碑銘陰記)는 좌()와 같다.

현화사주(玄化寺主)이며 승통(僧統)인 소현(韶顯)과 속리사주(俗離寺主)이며 왕자로써 승통(僧統)인 석탱(釋竀)416)이고, 수좌(首座)는 경현(慶玄)417)이며, 삼중대사(三重大師)는 석()이고, 중대사(重大師)는 관운(灌雲홍체(弘諦점영(占穎융보(融保숭간(嵩幹계상(繼相승개(僧鎧진소(眞召상현(尙賢승각(承覺동수(同壽우상(祐翔쌍소(雙炤수영(秀穎석칭(釋稱정신(定神각명(覺明관승(冠僧원약()418)·우현(右賢정여( )419)·석상(釋翔각지(覺支상지(尙之석운(釋雲방란(邦蘭보현(甫賢석림(釋琳증상(證祥석인(釋因품종(稟宗우승(祐承진령(眞領진감(眞鑑세량(世粱) 103명이요, 대사(大師)인 현개(賢盖충약()17명이며, 대덕(大德)인 정지(定支진보(眞保) 22명은 가르침을 받아 계승한 자들이다.

 

▨▨▨ 승록(僧錄)인 선량(先亮)과 중대사(重大師)는 현점(玄占혜종(慧宗양제(梁濟광석(廣碩경충(慶忠염충(念忠심월(心月응서(應諝)420)·민성(敏成경조(慶調원숭(元崇원석(元釋)28명이며, 대사(大師)는 의운(義雲석승(釋升위호(爲顥) 23명이고, 대덕(大悳)인 숭기(崇器섬월(暹月홍학(弘學균선(均善) 25명은 직책(職責)에 따라 법계(法階)를 첨가(添加)받은 자이며, 중직(重職혜등(惠燈홍범(弘範) 1,100여 명은 국사의 도덕을 흠모하여 귀화(歸化)한 자들이요, 수좌(首座)는 석규(釋虬)와 법령(法靈)이며, 삼중대사(三重大師)는 점선(占先위현(爲現성광(宋光)이요, 중대사(重大師)는 승소(昇炤성현(成現계언(繼言안예(安銳도생(道生강운(講雲이진(利眞)이며, 대사(大師)는 섬현(暹現주현(周現신창(神暢관성(貫成)이고, 대덕(大德) 주란(周蘭수기(秀㞯)421)·단직(單職진각()52명은 국사를 전후하여 입적(入寂)한 자들이다. 우건(右件) 문도(門徒)의 개좌(開座)와 직명(職名)을 새겨서 후세에 전하도록 한다.

승봉랑(承奉郞) 상서도관랑중(尙書都官郞中)이며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은 안민후(安民厚)는 글씨를 쓰고 대안원년(大安元年)422) 세재(歲在) 을축년(乙丑年) 중추월(中秋月)423)()에 세웠으며, () 이영보(李英輔)와 신() 장자춘(張子春) 등은 글자를 새기다.

 

[출전 :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2(1995)]

 

=> 각주는 첨부파일로 올린 글에 있습니다. 위의 글에 함께 올리지 못한 것은 일일이 정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넓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각주도 서둘러 정리해서 다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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