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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신 선조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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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종사연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02-15 22:45 조회4,730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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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래의 자료는 우리 족보를 살펴 찾아낸 것으로 누락된 선조님들이 계실 수도 있습니다. 누락된 분이 계시면 알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바로잡겠습니다. 


2. 약어 설명 : 지파의 이름을 공간 부족으로 간략하게 적었습니다.

  가. 음>참 => 음성공 후 참판공파,            나. 문>무 => 문정공 후 무산공파(무산부사공파)

  다. 생>참 => 정간공 후 생원공>참봉공파    라. 음>사 => 음성공 후 사직공파

  마. 문>첨 => 문정공 후 첨추공파        


3. 8번의 휘 윤손 선조님과 10번의 휘 익상 선조님은 각각 생원시와 진사시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시고 무슨 연유에선지 대과에는 이르지 않으신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그 배경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과거 준비에만 매달릴 수 없는 환경일 수도 있고, 다른 상황적 배경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단순히 능력만을 본다면 당연히 과거에 급제하실만한 상황이라 판단됩니다.

  조선시대를 통털어 생원이나 진사시에서 장원하고도 과거(대과)의 급제에 이르지 못한 분들이 227명이라는 조사 결과도 있는 걸로 보아 경제적 상황이나 기타 다른 상황들도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4. 이하의 자료는 직접 족보를 탐색하여 찾은 것으로 인용 시 출처를 바르게 적어주시면 좋겠습니다.

      2023년 2월 15일 밤  종사연구위원회 부위원장 대연 돈수.


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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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파(支派)

시험 종류

시기

족보 권면, 기타

1

13

계검(繼儉)

>

文科 別試

1533(中宗 28)年 癸巳

271

2

13

송수(松壽)

>

武科 試藝

1533(中宗 28)年 癸巳

287

3

15

충서(忠恕)

>

武科 增廣試

1589(宣祖 22)年 己丑

244, 子 得仁

4

15

유남(裕男)

>

武科 重試

1586(宣祖 19)年 丙戌

288

5

16

득인(得仁)

>

武科

급제 시기 不明

2권 196면

父子 武科 壯元

6

16

삼락(三樂)

>

武科 庭試

1541(仁祖 19)年 辛巳

2694

7

20

경하(景夏)

>

文科 庭試2

1736(英祖 12)年 丙辰

2499

8

21

윤손(允孫)

>

式年 生員試

1777(正祖 1)年 丁酉

4권 161면

科擧 不及

9

24

세욱(世煜)

>

武科 增廣 庭試

1869(高宗 6)年 己巳

2권 1480면

慶科 庭試 景武臺

10

25

익상(翊常)

>

增廣 進士試

1874(고종 11)年 甲戌

科擧 不及

11

26

용전(容銓)

>

武科 增廣 庭試

1887(高宗 24)年 甲戌

31206

댓글목록

종사연구님의 댓글

no_profile 종사연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6세 휘 득인(得仁) 선조님의 부친이신 휘 충서(忠恕) 선조님은 역시 무과 장원급제하시고, 임란 때 정문부의 막하에서 함경북도 지역의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셨으나 전쟁 중에 전사하셨고, 길주의 숭렬사와 임명서원에 배향되시었습니다. 고종 신묘년(1891년)에 보국숭록대부 병조판서에 추증되셨습니다.

종사연구님의 댓글

no_profile 종사연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그리고 13세 휘 계검 선조님은 문과방목엔 병과 27위로 급제한 것으로 나오지만 중종실록(1533년, 중종28년 4월 29일 辛丑 4째 기사)엔 장원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이는 초방(草榜)을 이미 썼는데, 주상의 명에 따라 재검토하여 방을 다시 낸 것으로 보입니다.  아래에 해당 중종실록 기사를 옮깁니다.
 [중종실록 중종 28년 4월 29일 신축 넷째 기사]
 * 초방(草榜)을 이미 썼는데 고쳐서 다른 방(榜)을 내었다.
  【1등 1인은 원계검(元繼儉), 2등 3인은 정언각(鄭彦慤)·한주(韓澍)·이도남(李圖南), 3등 10인은 경혼(慶渾)·임열(任說)·이세구(李世球)·이희손(李希孫)·윤원형(尹元衡)·민구(閔球)·박붕린(朴鵬麟)·이현충(李顯忠)·남궁숙(南宮淑)·김기(金祺)이다.
  앞에서 합격하였다가 뒤에 떨어진 자는 곽희영(郭懷英)과 김언부(金彦傅)이다. 앞에서 떨어졌다가 뒤에 합격한 자는 윤원형·민구·박붕린·남궁숙이다.】
<原文> 草榜已書, 而改出他榜。 【一等一人元紙儉, 二等三人鄭彦懿、韓澍、李圖南, 三等十人慶渾、任說、李世球、李希絲、尹元衡、閔球、朴鵬鱗、李顯忠、南宮淑、金祺也。 前中而後落者, 郭懷英、金彦傅也, 前落而後中者, 尹元衡、閔球、朴鵬鱗、南宮淑也。】

종사연구님의 댓글

no_profile 종사연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 그에 관한 내용이 중종실록 같은 날짜의 바로 앞 기사에 실려있습니다. 아래와 같습니다.
 2. 중종실록 중종 28년(1533년) 4월 29일 셋째 기사
문과(文科) 시관(試官)들에게 전교하기를,

"강경(講經)과 제술(製述)에서 모두 입격(入格)한 자가 12인이니 모두 뽑되 1등 1인, 2등 3인, 3등 8인으로 하여 출방(出榜)하라."

【1등 1인은 원계검(元繼儉), 2등 3인은 정언각(鄭彦慤)·한주(韓澍)·이도남(李圖南), 3등 8인은 경혼(慶渾)·임열(任說)·이세구(李世球)·이희손(李希孫)·이현충(李顯忠)·김기(金祺)·곽회영(郭懷英)·김언부(金彦傅)이다.】

하고, 시관이 방을 써 붙이려 할 즈음에 전교하기를,

"전에 대신(大臣)과 대간이 ‘경학(經學)과 사장(詞章)은 모두 폐할 수 없다.’ 하기에 강경(講經)와 제술의 분수를 통계하여 강경과 제술에 모두 입격한 사람을 뽑고자 했다. 지금 대관의 말을 들으니, ‘비록 입격하지 못하였지만 강경과 제술의 분수가 많은 사람도 뽑아야 한다. 그래서 분수에 따라 차례대로 서계(書啓)한다.’고 하는데 시관의 뜻은 강경의 분수를 통계하여 뽑자는 것인가?

식년이라면 전에 정해진 숫자가 있지만 이번에는 전에 정해진 숫자가 없다. 마땅히 그때그때 제술하여 등수에 든 것을 보아 뽑아야 한다. 그래서 이제 강경과 제술에 모두 입격한 자를 뽑게 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일이 잘못되었다면 반드시 후에 비난이 있을 것이다. 이제 대신과 의논하고자 하니 출방(出榜)하지 말라."

하였다. 영의정 정광필이 의논드리기를,
"세종조 때에는 ‘대통(大通)’과 대불통(大不通)이 있었기 때문에 강경의 분수 많은 것이 25∼26분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만일 제술에 입격하지 못하였으면 뽑지 않았습니다. 《대전(大典)》이 산정(刪定)된 후부터 강경과 제술의 분수를 통제하여 뽑았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에서 지금 쓰는 법전(法典)입니다. 그러나 국가의 대사이니, 오직 상께서 재단(裁斷)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고, 좌의정 장순손(張順孫)은 의논드리기를,
"식년에는 강서와 제술의 획수(劃數)를 합쳐 계산하기 때문에 비록 제술에 획수가 없더라도 강서에서 만일 많은 획수를 얻으면 통계(通計)하는 것이 전례입니다. 다만 지금은 이미 출방하였으니, 다시 고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하고, 우의정 한효원(韓酵元)은 의논드리기를,
"강경과 제술의 분수를 통계하는 것은 이미 전규(前規)가 있으니, 오직 상께서 재단하시면 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제 대신이 의논한 것을 보니 대의는 모두 같다. 7분(分) 이상은 뽑는 것이 옳다. 등수는 내가 다시 헤아리겠으며, 전시(殿試)는 위에서 정하겠다. 이는 복시(覆試)이니 시관을 나누어 정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