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 내 전체검색

 

일가사랑방

"고려史를 바로잡아주세요" 歷史와 소송하는 후손들

페이지 정보

작성자 no_profile 종사와족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05-02 21:01 조회385회 댓글0건

본문

조선일보 > 문화·라이프   김충령 기자 입력 2011.07.23. 03:20       업데이트 2011.07.24. 06:19 


아래의 글은 2011년 7월 23일字 조선일보 문회.라이프 면에 실렸던 글입니다. 한번 쯤은 생각해 볼 문제라 생각돼 이곳에 옮겨 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정사(正史)를 바탕으로 쓴 역사책이 천년 전에 살았던 조상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그 후손이 출판사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걸었다 패소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후손 오모(62)씨가 명예훼손을 당했다고 주장한 조상은 고려 태조 왕건의 부인인 장화왕후 오씨.


  고려사(高麗史)에는 2대 임금 혜종의 출생에 대한 다소 민망한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903년 왕건은 궁예의 명을 받아 금성(전라도 나주)을 정벌하고 그곳의 호족인 오다련(吳多憐)의 딸과 혼인을 했다. 왕건은 오씨와 동침은 했지만 그 출신이 중앙귀족에 비해 미미한 것을 염려해 임신을 시키려 하지 않았다. 왕건은 그의 정액을 돗자리에 배설했는데 오씨가 돗자리에 묻은 정액을 손으로 넣어 임신을 했고, 이렇게 태어난 혜종의 이마에 돗자리 자국이 새겨져 있었다는 것.


  조선 태조에서 철종까지 472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편년체(編年體) 사서 조선왕조실록’. 실록과 같은 정사는 다른 역사서를 쓰는‘1차 사료역할을 한다.

  역사서의 저자 박영규씨가 이 내용을 자신의 책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에 소개하자 후손 오씨는 "과학적 진실에 명백히 반하는 허위 사실을 그대로 옮겨 장화왕후와 그 후손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역사적 사실에 관해서는 망인이나 후손들에 대한 명예훼손이라고 볼 수 없다"고 원고패소 판결했다.


'역사와의 소송'은 비단 장화왕후 건만이 아니다. 역사서 저자들은 사실(史實)에 입각해 역사적 인물에 대한 부정적 내용을 책에 썼다가 그 후손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입을 모은다.

 

박씨는 다른 저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실계보'에서 태조 이성계의 이복형 이원계(李元桂)'부친 이자춘과 첩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庶子)'라고 기록했다가 이원계의 후손들로부터 항의를 받았다. 후손들은 "당시는 여러 정부인을 두는 중처(衆妻)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이원계는 서자가 아닌 이자춘의 장남"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은 이원계를 이자춘의 서자로 기록한다.


  한국사에 관한 자료를 조사·연구·편찬하는 국사편찬위원회에도 '내 조상에 대한 기록을 수정해달라'는 후손들의 청원이 끊이지 않는다. 1456년 성삼문·박팽년 등과 더불어 단종 복위를 기도하다 처형당한 공조판서 김문기의 후손들은 김문기도 사육신에 포함시켜달라고 국사편찬위에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조선 태종의 장자 양녕대군의 장인인 김한로의 후손들은 김한로에 대해 '세자궁에 여자를 출입시켜 세자를 오도하고, 보관하던 사초를 불태웠다'는 등 부정적으로 기술된 내용을 바로잡아 달라고 청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한로의 부정적 행태에 대한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내용이다. 국사편찬위 관계자는 "주로 60대 이상 은퇴자들 중 역사서에 자신의 조상이 부정적으로 기술된 것을 뒤늦게 알고 항의하러 왔다가 정사에 기록된 내용임을 알고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항의'의 수준을 넘어 '봉변'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역사평론가 이덕일씨는 실록을 근거로 자신의 책에 '송시열이 북벌론과 무관하다'고 주장하자 송시열 후손들은 '화형식'까지 벌이며 반발했다. 율곡 이이의 '10만양병설'이 당시 실록에 기록돼 있지 않음을 지적했다가 역시 그 후손들로부터 거센 압력을 받았다. 이씨는 "팩트가 틀렸다면 고치겠는데 왜 그 팩트를 끄집어냈느냐고 비판하니 할 말이 없다""조상의 행위는 오래전에 완료된 것이고 역사의 평가에 맡겨야 할 부분"이라고 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역사학자는 "역사적 행위에 대해선 역사의 평가에 맡겨야 하는데 후손들이 가문의 명예를 위해 이를 간섭하는 것은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大淵 曰, 역사는 역사의 평가에 맡겨야 함을 모르는 바 아니나 후손된 입장에서는 후손으로서의 도리에, 나아가 자신의 후손에게 끼칠 부정적 영향이 부담스럽고 싫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어떻게든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보고자 함이었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불가능하리란 걸 모르지는 않았을 터!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를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한 번쯤은 생각해 볼 내용입니다. “역사와의 대화!”

 또, 그렇게 역사를 바꿔보고자 하는 일이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과연 얼마나 어떻게 받아들여질까도 함께 생각해야 하는 건 아닌지...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