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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公墓表(휘 德裕) 權尙夏 寒水齋先生文集 卷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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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종사와족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03-26 01:37 조회670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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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공 묘표(元公墓表)  휘 德裕  18世 계사 인터넷족보 2권 290쪽. 문정공후 첨추공파

  * 우리 가승에 실린 공의 묘표와 한수재 권공〔寒水齋 權尙夏〕의 문집에 실린 글이 대략은 같으

     나 작은 차이가 있어 권 공의 문집에 실린 본래의 글을 여기에 옮겨 그 본래의 글 또한 후대에 

     전하고자 합니다. 

  * 물론 이것은 가승 [추범례]에 보이듯 분량이 많아 간행이 늦어지는 걸 피하여 속히 간행하기 

    위함라고 밝힌대로 그 요체는 살리되 문식(文飾)을 덜어낸 것으로 보입니다.

[DCI]ITKC_BT_0420A_0340_010_0100_2005_004_XML   

낙성(洛城)의 동쪽 화산(華山)의 밑에 고환과 같은 무덤이 있다. 그것은 옛날 독실한 행적이 있던 선비인 원공윤(元公潤) ()의 무덤이다. 공의 이름은 덕유(德裕)이고, 원주인(原州人)이다. 

윗 조상으로 홍필(弘弼)은 고려에 벼슬하여 직위가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從二品)에 이르렀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황()이 있는데, 우정언(右正言 : 正六品) 증 이조판서(贈吏曺判書) 원산군(原山君)이다. 효연(孝然)은 예조판서(禮曹判書) 원성군(原城君) 시호문정(文靖)이다. 고조(高祖)는 순보(純輔)인데, 일찍이 문행(文行)으로 이름이 나서(장예원) 사의(司議 : 正五品)로 증좌승지(贈左承旨)이다. 증조(曾祖)는 사열(士悅)인데 (종친부) 전부(典簿:正五品) 증병조참판(贈兵曺參判)이다. ()는 흡()인데 증호조참판(贈戶曺參判)이다. ()는 상()인데 통제사(統制使 : 正三品堂上)로 청렴과 검약으로 칭송되었으며, ()는 정부인(貞夫人) 안동김씨(安東金氏)인데, 참의(參議) ()공의 손으로, 장사랑(將仕郎) ()의 딸인데, 1656(숭정 丙申) 1025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만년에 종숙(從叔)인 부사용(副司勇) ()의 뒤를 잇게 되었는데, 원천군(原川君) ()과 좌랑(佐郞) 덕수 이목(德水李穆)은 내조(內祖)와 외조(外祖)가 된다.

 

공의 성품은 어질면서도 강직하고 방정하여 어릴 적부터 크고 작은 일에 속이거나 숨긴 적이 없으며, 때때로 일에 따라 나아가 간언을 하면 통제공은 유달리 사랑하였다.

자라서는 외재(畏齋) 상신 이단하(李端夏 : 1625~1689, 계주(季周), 연재(戀齋), 외재(畏齋), 송간(松磵). 본 덕수(德水), 시호(文忠)에게 배웠는데, 외재는 칭찬하기를 맑고 뛰어나 속되지 않으며, 성실하여 거짓이 없다고 하였다. 공은 책으로는 논어, 맹자, 소학을 좋아하고 시()로는 두보[老杜]를 몹시 아껴서 가끔 지은 것이 있는데 매우 아치가 있었다. 효도와 우애가 돈독하고 항상 부모를 모시면서 무슨 연고가 있지 않으면 곁을 떠나지 않고 한밤중에야 그제야 물러갔다. 새벽이면 반드시 의관을 차리고 잠자리 문안을 드렸다. 1688(무진)에 어머님의 병이 위독하자 공은 옷을 벗지 않고 밤에도 자지를 않았으며, 손에 약과 음식을 잡고서 반년을 하루와 같이 하였다. 하루는 어머님이 고통이 심하여 모르는 사이에 소리치며 얘야 듣지 못하느냐?” 하니, “저는 차마 그 애타는 상황을 보지 못하겠습니다고 하였다. 1689(己巳) (: 왕자 定號로 생긴)로 생긴 가 일어났다. 통제공이 원주(原州)에서 벼슬하지 않고 사임하였다.

  1693(계유)에 공은 서울에 있으므로 뵙고 돌아온 것이 겨우 하룻밤을 지냈는데 갑자기 마음이 아파와 어찌할 겨를이 없이 쫒아가 문안을 하는데, 통제공의 병이 이미 위급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상히 여겼다. 공이 앞뒤로 상()중에 있으면서 상례(喪禮)를 지키느라 지나치게 몸을 다쳐, 거의 온전하지 못하므로 집사람들이 생강과 계피즙을 거듭 들기를 요청했지만, 아주 굳게 거절하며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엔 목숨이 정해 있다고 하였다. 이윽고 상을 마치게 되기까지 몸을 다치게 깊은 정성을 다하고, 상을 치른 나머지도 추모를 하기를, 한결같이 단괄(袒括: 왼쪽어깨를 드러내고 풀었던 머리를 묶음)할 때처럼 하였다.

큰형을 섬기기를 사랑과 존경으로 모두 지극히 하였으며 큰형(원덕휘)이 관서(關西, 평안병사 재직중 별세)에서 돌아가자, 공은 달려가 울며 가슴을 치며 살고 싶지 않은 듯하였다. 종족(宗族)들에게 추앙되고친하던 친하지 않던 가릴 것 없이 모두 그들의 환심을 얻었으며, 두루 끝까지 가난한 이를 구휼하며 의복 역시 애석함이 없이 하여, 평소의 품행과 지절(志節)을 매우 굳게 지키며 통제공의 화려한 처지를 거듭 따르면서 한결같이 목소리와 안색이 어지럽히지 않게 하였다. 바르게 뜻을 세우고, 정의롭게 일을 처리하며, 항상 말하기를 나는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것이 없다고 하고, 몸과 마음을 스스로 점검하여 부끄러운 점이 없도록 하였다. 남이 착한 것을 들으면 자기가 한 일처럼 기뻐하고, 그의 잘못을 보게 되면, 또한 더럽혀질까 하였다. 평생을 단정히 앉아 독서하는 것을 좋아하여 늙도록 게을리 하지 않고, 항상 자제(子弟)들에게 타이르기를, 선비가 배우지 않으면 사람 노릇을 할 수 없으니, 너희는 반드시 노력하라고 말하였다. 잘못이 있으면 반드시 엄한 말로 가르치며 질책을 하였다. 생계의 방편이 되는 것을 일삼지 않아 소박하게 옷을 입고, 일반적인 세력과 이익이나 높은 지위에도 욕심이 없이 태평하였다.

남과 사귐에는 오래도록 존경하며, 비록 친하더라도 읍배(揖拜 : 두 손을 마주잡고 이마에 올려 허리 굽혀 절함)로 반드시 하지 않았으며, 거자(擧子 : 과거에 응시하는 사람)의 학업에 조금 일 삼았지만, 나중에는 외롭게 다시는 시험보러 가지 않았다. 필세(筆勢)는 호방하고 웅건하여 남에게 추앙되었는데, 찾는 사람이 있었지만 늘 사양하였다.

1711(신묘, 숙종37) 529일 산증(疝症 : 아랫배가 당기는 병, 비뇨기병)으로 종명하니 나이 56 이었다. 공인(恭人) 양씨(梁氏, 1653~1707)와 함께 신생(申生)의 원()에 장사지냈다. 그 동네는 도내[道川]라 한다. 공인은 본관이 제주[瀛州]인데 기묘명현(己卯名賢)인 교리(校吏) 양팽손(梁彭孫 : 1480~1545, 학자, 大春, 學圃, 시호 惠康)의 현손(玄孫)인 절도사(節度使) 양우급(梁禹及)의 딸로 참의(參議)인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 : 1573~1654, 학자字 士彦, 隱峰, 牛山, 氷壺, 大愚菴, 본관 竹山, 시호 文康)의 외종손이다.

단정엄숙하며 아름답고 밝아, 부녀자의 법도를 잘 갖추어, 시부모를 예의로 모시고 동서끼리 화목하게 지내면서, 가난을 떨쳐내어 풍요롭게 하여, 공에게 있고 없는지 모르도록 하였다. 1653(계사) 1220일에 태어나 1707(정해) 1111일에 돌아갔다. 아들하나는 일규(一揆)이고, 딸 셋은 송징휴(宋徵休), 이하무(李夏茂), 유언종(兪彦宗)에게 시집갔다.

   일규(一揆)는 감역(監役) 이시현(李蓍顯)의 딸에게 장가들어 1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내가 도다운 행실과 효도하는 뜻을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는 것을 살펴 보건대, 그 후대는 반드시 번창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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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權尙夏 寒水齋先生文集 卷33  [DCI]ITKC_MO_0420A_0340_010_0100_2003_A151_XML
洛城之東華山之下。有睾如之丘。是故篤行之士元公公潤之玄廬也。公諱德裕。原州人。上祖弘弼。仕麗位至知門下省事。入我朝有曰晃。右正言贈吏曹判書原山君。曰孝然。禮曹判書原城君謚文靖。高祖諱純輔。早以文行名。司議贈左承旨。曾祖諱士悅。典簿贈兵曹參判。祖諱翕。贈戶曹參判考諱相。統制使。以廉儉稱。妣貞夫人安東金氏。參議公奭之孫。將仕郞暄之女。以崇禎丙申十月二十五日生公。公晩爲從叔父副司勇諱枓之後。以原川君諱䎘。佐郞德水李穆爲內外祖。公性仁而剛方。自幼於鉅細事。無所欺隱。時能隨事進諫。統制公奇愛之。及長學于畏齋李相國端夏。畏齋稱曰淸秀不俗。誠實無僞。公於書嗜論孟小學。於詩酷愛老杜。往往有所作。甚有雅致。篤於孝友。常侍父母。非有故不離。夜分乃退。晨必衣冠而問寢。戊辰慈夫人疾篤。公衣不解夜不寢。手執藥餌。半年如一日。一日慈夫人痛甚不覺發聲曰某兒聞否。吾不忍見其焦煎狀。己巳禍作。統制公歸原州不仕。癸酉公在京。覲而歸者纔經宿。忽心痛。蒼黃趨省。統制公病已劇矣。人皆驚異。公前後居喪守制。過毀幾不能全。家人屢請薑桂之滋則拒之甚堅曰。死生有命。旣沒喪而創冞愨。喪餘追慕。一如袒括時。事伯氏愛敬俱至。伯氏卒于關西。公奔走號擗如不欲生。推之宗族。無親疏皆得其歡心。周窮恤貧。衣服亦無所惜。操守甚固。屢隨統制公繁華地。一不爲聲色所撓。立心以正。制事以義。常曰吾無過人者。自檢身心。無所媿怍。聞人之善。喜如己有。見其非。若將浼焉。平生好端坐讀書。至老不懈。常戒子弟曰士不學。不可以爲人。汝其勉之。有過則必嚴辭誨責。不事生產。被服朴素。於一切勢利芬華泊如也。與人交。久而敬。雖狎拜揖必恭。語不爾汝。少事擧子業。旣孤不復就試。筆勢豪健。爲人所推。而有求者輒辭。辛卯五月廿九日。以疝症終。壽五十六。與恭人梁氏。葬于申生之原。其洞曰道川。恭人貫瀛洲。己卯名賢校理彭孫之玄孫。節度使禹及之女。參議牛山安公邦俊之外曾孫。端莊淑明。婦儀甚備。事舅姑以禮。處妯娌以和。撥貧以饒。使公不知有無。生于癸巳臘月廿日。歿于丁亥至月十一日。有一男一揆。三女適宋徵休,李夏茂,兪彥宗。一揆娶監役李蓍顯之女。生一男一女皆幼。余觀敦行孝義。不求人知者。其後必昌。今公之胤子早年力學。其進未涯。公之未食之報。當拭目而竢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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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본문에 뒤이어>
지금 공의 후계자가 어린 나이에 공부에 힘쓰고 있는데 그 진보가 끝나지 않았으니, 공이 아직 누리지 못한 보답은 당연히 눈을 부비게 될 것이니 기다려 보시라.

  => 글이 한 곳에 올라가지 않기에 그 나머지 부분을 이곳에 옮겨 적습니다. 너른 양해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