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원씨(元氏)의 득성 |
원씨 성은 은 상나라의 원선(銀商元铣) 이후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성씨입니다. 원씨는 오랜 역사를 가진 중국의 성씨로, 가장 구체적인 증거는 은나라와 상나라의 명신인 원선(元銑)입니다. 원선에 대해서는 청나라 학자 장수(張澍)가 저술한 '성씨오서(姓氏五書)'에서 "제을(帝乙)은 입수신(立受辛)을 폐기하고 태사 원선은 법에 따라 힘써 상나라 때 원씨가 있었습니다. 이로써 원씨는 3000년 이상의 역사를갖게 됐습니다. 제을이 주왕(신기의 이름을 받음)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것에 반대했던 은나라 태사 원선은 당연히 후대 원씨 최초의 시조입니다.
그러나 주나라 춘추전국시대에는 기원전633년 위(衛)나라와 조나라에 각각 두 개의 원(元)씨(원훤,공자원)가 생겨났고, 남북조 시대에는 북위 7대황제 효문제께서성을 원(元)씨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외에도 적어도 세 개 이상 생겨 원씨의 출처가 다양하고 혈연도 단순하지 않다.
춘추전국시대 기록에 주나라 제후국인 위(衛)나라의 재상을 지낸 원훤(元喧)선조의 기록이 다수 있어 정리하였다. 주(周, 기원전 1046년 ~ 기원전 256년)는 상나라를 이어 중국에 존재했던 나라이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오래 존속한 나라이며, 790년간 왕조를 이어갔다. 민족은 화하족(華夏族)이다. 춘추전국시대는 기원전이고 2천년 이상 아득히 먼 옛일들을 알수 없으며 문헌도 부족하여 계대 나 원씨와 연결하기는 더욱 어렵다.
원훤[元喧](?~ 기원전 630년) 춘추시대 위국대부(衛國大夫)
원씨(元氏)의 시조는 고대국가 주나라(周)나라 의 제후국인 춘추시대 위(衛)나라 31대~33대 위성공 때 출위대부와 재상을 지냈다. 주나라 문왕(文王)의 후예로 성은 희(姬) 이요 씨는 원씨(元氏)이다. 자료나 문헌이 부족하여 계대연결은 어렵다.
<역사 기록>
위 성공 2년(기원전 633년), 초(楚) 성왕 미웅 頵率 진(陳), 채(蔡), 정(鄭), 허(許) 연합군을 이끌고 송(宋)나라를 공격하자 송은 공손자를 진(晉)나라로 보내 위급함을 알렸다. 이듬해 진 문공은 송의 군대를 구해 위나라로 와 위성공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요청했지만 성공이 허락하지 않자 진군은 남하를 돌아 송나라로 향했다. 나중에 진나라가 위나라에 함께 출병할 것을 요구했고, 위나라의 대부는 출병을 허락하기를 원했고, 성공이 다시 허락하지 않자, 원훤(元咺)는 공자를 세워 위군으로 삼았다. 당초 진(晉) 문공은 귀중히 여겨 망명할 때 위나라를 거쳐 당시의 국군 위문을 거쳤다.
1. 원씨현(元氏縣)의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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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6월 중국 석가장시 아래 30km 원씨현(위안스현)을 원종태,원종갑 종친이 원훤(元喧)선조의 흔적을 찾아 2차방문했다.
2,654년 전의 역사의 흔적을 찾는다는 것은 단기간에 찾기에는 무리가 있다. 혹시 원씨가 살고 있는지 일부주민에게 물어 보았으나 보질 못하였고 잘모르겠다고 한다. 사전 정보를 입수한 원씨공원에 방문하였다. 조나라 원자공의 동상과 그당시 원씨현으로 되었다는 설명이 있었다.
북방 조나라 원공자는 기원전255년에 왔다고 하는데, 원휜선조님과 의 375년이후의 인물이다. 춘추시대의 2개의 원씨가 출현된 것이다. 지금의 원씨현이 주나라 제후국인 위(衛)나라국의 위치와 거의 일치하다. 수천년전 역사이므로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지금의 원씨현이 주나라 제후국인 위(衛)나라국의 위치와 거의 일치하다. 수천년전 역사이므로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Ⅱ. 남북조 시대 원씨(元氏)의 득성(원위:元魏,北魏) |
원위(元魏)의 528년 하음의변 과 550년 북위가멸망하기까지 화를 피하여 일부 황족 원씨들이 유민들과 한반도 내륙인 고구려 와 신라로 그리고 해상으로 여러형태로 한반도로 흩어져 이동가능성이 높을것으로 사료하고 있다. 따라서 북위는 시기나 정황으로 보아 우리원씨의 중시조에 가깝다고 할수 있다.
북위/원위(北魏/元魏 ; 386 ~ 534)는 중국 남북조시대 선비족(鮮卑) 탁발부(拓跋部)에 의해 화북에 건국된 왕조이다. 한(漢 : BC 206~AD 220)의 멸망부터, 수(隋 : 581~618)의 재통일 이전까지 약 360년 동안의 혼란기 가운데 화북[華北]을 통치했다. 국호가 위나라 였기에 전국시대 위(魏)나라와 삼국시대 조조의 위(魏)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북위라고 불리고 있다. 기타 후위(後魏), 원(元)씨가 지배하였다 하여 원위(元魏), 대위(代魏)란 호칭을 사용하기도 한다. 7대 효문제께서 황제성을 원씨(元氏)로 사용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 원위(元魏)의 대표적 황제 제7대 효문제 와 제8데 선무제 에 대하여 우선 조사연구를 하였다.
1.원위(元魏)의 제7대 황제(효문제)
<출생>
467년 10월 13일/북위 대군 평성 황궁 자궁(現 산시성 다퉁시)
<즉위>
471년 9월 20일/북위 대군 평성 황궁(現 산시성 다퉁시)
<사망>
499년 4월 26일 (향년 32세)/북위 하남군 낙양 곡당원 행궁(現 허난성 뤄양시:현낙양)
능묘 : 장릉(長陵)
<재위기간>
북위 황태자 - 469년 6월 27일 ~ 471년 9월 20일
<제7대 황제>
471년 9월 20일 ~ 499년 4월 26일
묘호는 고조(高祖)였으며, 시호는 효문황제(孝文皇帝)였다. 휘는 굉(宏)이었고, 제6대 황제인 현조 헌문제의 장남이었다.
효문제(467~499.)는 중국 북위(北魏 : 386~534/535)의 6대 황제(재위 471~499년), 이름은 탁발굉(拓跋宏)이다. 효문제는 선비족(鮮卑族)으로 후에 한자성을 따서 성을 원(元)이라 고치고 이름을 원굉(元宏)이라 했다. 현조 헌문제(顯祖獻文帝)의 아들로서 471년 5살에 즉위해 년호를 연흥(延興)으로 고쳤다. 효문제는 490년까지 조모인 풍태후(馮太后)의 섭정하에 있었다. 3살에 모친을 읽은 효문제는 풍태후 슬하에서 자랐다. 풍태후는 효문제에 대한 교육을 게을리하지 않고 한족 토인(土人)을 전문 배치해 그에게 유가경전을 가르쳤다.
묘호는 고조(高祖)이다. 부족민의 중국화를 장려해 북위를 중국식 왕조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토지개혁을 단행해 중국 토지제도의 기초를 마련했다. 471년 제위에 올라 원(元)이라는 중국식 성을 사용하고, 수도를 후한(後漢 : 25~220)의 수도였던 뤄양[洛陽]으로 옮겼다. 조정에서 중국어를 사용했고, 귀족들에게 중국식 복장과 성을 사용하도록 하는 등 탁발씨 부족의 중국화에 노력했다.
재위 471년 9월 20일 ~ 499년 4월 26일
즉위식 연흥(延興) 원년 8월 20일(471년 9월 20일)
전임 헌문제(獻文帝)
후임 선무제(宣武帝)
북위의 황태자
재위 469년 6월 27일 ~ 471년 9월 20일(즉위식 황흥(皇興) 3년 6월 3일)(469년 6월 27일)
전임 헌문제(獻文帝) 탁발홍(拓跋弘)
후임 폐태자(廢太子) 원순(元恂)
이름: 원굉(元宏)
별호 탁발굉(拓跋宏)
묘호 고조(高祖)
시호 효문황제(孝文皇帝)
능호 장릉(長陵)
연호 연흥(延興) 471년 ~ 476년
황흥(皇興) 476년
태화(太和) 477년 ~ 499년
<신상정보>
출생일 천안(天安) 2년 8월 29일(467년 10월 13일)
사망일 태화(太和) 23년 4월 1일(499년 4월 26일) (31세)
부친 헌문제(獻文帝) 탁발홍(拓跋弘)
모친 사황후(思皇后) 이씨(李氏)
배우자 폐후(廢后) 풍씨(馮氏)
유황후(幽皇后) 풍씨(馮氏)
정황후(貞皇后) 임씨(林氏)
문소황후(文昭皇后) 고조용(高照容)
북위 제5대 황제 헌문제(獻文帝)의 맏아들로써 황흥(皇興) 원년(467년) 8월 29일(양력 10월 13일)에 태어났다. 효문제의 생모인 부인 이씨(李氏)는 황흥 3년(469년) 자결을 강요당했는데, 당시 북위는 외척의 전횡을 피하기 위해 황태자가 세워지는 경우 그 생모를 죽이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자귀모사子貴母死). 황흥 5년(471년) 아버지 헌문제가 적모(嫡母) 풍태후(馮太后)와 대립하다 패하고 풍태후의 압박으로 8월 20일(양력 9월 20일) 반강제로 양위해 즉위하게 되었다. 당시 효문제의 나이는 겨우 다섯 살이었다. [1] 즉위한 뒤 대대적인 사면을 내리고 연호를 연흥(延興)이라 고쳤다.
풍태후는 헌문제의 치세 때부터 실권을 장악하고 수렴청정을 펼치고 있었는데, 헌문제를 퇴위시키고 효문제를 즉위시켰을 때는 겨우 다섯 살이었기에, 그녀는 다시금 어린 황제를 내세워 수렴청정을 행한다. 이는 태후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고, 풍태후는 정치적인 수완이 뛰어났기에 반란을 진압하고 반록제(班祿制)나 삼장제(三長制), 균전제(均田制) 등의 여러 가지 개혁을 실시하고 중앙 재정(공조公調)과 지방재정(조외調外)을 분리[2]하는 등 북위의 중앙집권화에 힘써 많은 치적을 쌓았다. 풍태후는 태화(太和) 14년(490년)에 사망하였는데, 이때 효문제는 풍태후의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닷새 동안이나 식사를 들지 않고 넉 달 동안 정무를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점을 들어 풍태후가 실제로 효문제의 생모였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설도 존재하고 있다.
풍태후가 죽은 뒤에 효문제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지만, 풍태후의 정책은 그대로 유지 계승되어 북위는 한화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우선 태화 17년(493년) 평성(平城)[3]에서 낙양(洛陽)으로 천도를 강행하였다. 이때 효문제는 반대를 예상하고 제(齊) 원정을 구실로 낙양에 이르렀다가, 그곳에서 선비족 여러 장군들의 남정(南征)에 대한 간언을 따르는 조건으로 낙양 천도를 실현시켰다고 한다.
그는 선비의 성씨를 한풍(중국풍)으로 고치기로 하고 국성(國姓)을 탁발(拓跋)에서 원(元)으로 고쳤으며, 신하들에 대해서도 반강제적으로 한풍 성씨를 하사하였다. 그 밖에도 선비의 말과 복장 비롯한 선비족의 풍습을 금지시키고 선비식 관명을 한족식 관명으로 고치는 등 선비의 한화정책을 추진해나갔다. 또한 한족의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을 부분 채용하여 남조를 본뜬 북조귀족제를 성립시켰다. 하지만 선비족들은 피지배층인 한족 문화를 사용하는 것에 큰 불만을 가졌고 특히 6진에 있던 선비족 군인들은 대규모로 반란을 일으켜 효문제의 한화정책은 북위의 멸망을 가져다 주었다.
태화 23년(499년) 4월 초하루(양력 4월 26일)、곡당원(谷塘原)의 행궁(行宮)에서 33세로 붕어하였다. 사후 묘호를 고조(高祖),시호를 효문황제(孝文皇帝)라 하였다.
<가계도>
황후(정비) : 폐황후 풍씨 풍청(廢皇后 馮氏 馮淸)
황후(계비) : 유황후 풍씨 풍윤(幽皇后 馮氏 馮潤, 469년 ~ 499년) - 폐황후 풍씨의 동생
황후(추존) : 문소황후 고씨 고조용(文昭皇后 高氏 高照容, 469년 ~ 497년)
제2황자 : 황태자 원각(元恪) - (선무제)
제5황자 : 광평문목왕 원회(廣平文穆王 元懷, 488년 ~ 517년) - (무목제)
황손 : 평양왕 원수(平陽王 元修) - (효무제)
황녀 : 장락공주(長樂公主, 489년 ~ 525년)
황후(폐서인) : 폐 정황후 임씨(廢 貞皇后 林氏, ? ~ 483년) : 자귀모사제도로 사망
제1황자 : 폐태자 원순(廢太子 元恂, 483년 ~ 497년)
후궁 : 소의 풍씨 풍산(昭儀 馮氏 馮姍) - 폐황후 풍씨 동생
후궁 : 귀인 원씨(貴人 袁氏)
제3황자 : 임조왕 원유(臨洮王 元愉, ? ~ 508년) - (서위 문경제)
후궁 : 부인 나씨(夫人 羅氏, ? ~ 514년)
제4황자 : 청하문헌왕 원역(清河文獻王 元懌, 487년 ~ 520년) - (동위 문헌제)
제6황자 : 여남문선왕 원열(汝南文宣王 元悅, 494년~ 532년)
후궁 : 부인 이씨(夫人 李氏)
후궁 : 빈 조씨(嬪 趙氏)
황녀 : 의양공주(義陽公主)
후궁 : 대빈 정씨(大嬪 鄭氏)
후궁 : 소빈 정씨(小嬪 鄭氏)
제7황자 : 은왕 원조(隱王 元恌, 494년 ~ 500년)
후궁 : 빈 왕씨(嬪 王氏)
후궁 : 대빈 최씨(大嬪 崔氏)
후궁 : 소빈 최씨(小嬪 崔氏)
후궁 : 빈 위씨(嬪 韋氏)
후궁 : 빈 노씨(嬪 盧氏)
생모 미상
황녀 : 난릉공주(蘭陵公主)
황녀 : 회양공주(淮陽公主)
황녀 : 화양공주(華陽公主)
황녀 : 서하공주(西河公主)
황녀 : 순양공주(順陽公主)
황녀 : 시평공주(始平公主)
황녀 : 제남공주(濟南公主)
황녀 : 의양공주(義陽公主)
황녀 : 고평공주(高平公主)
황녀 : 남양공주(南陽公主)
2. 원위(元魏)의제8대 선무제 황제
재위 499년 5월 7일 ~ 515년 2월 12일
즉위식 태화(太和) 23년 4월 12일(499년 5월 7일)
전임 효문제(孝文帝)
후임 효명제(孝明帝)
북위의 황태자
재위 497년 2월 25일 ~ 499년 5월 7일
즉위식 태화(太和) 21년 1월 8일(497년 2월 25일)
전임 폐태자(廢太子) 원순(元恂)
후임 효명제(孝明帝) 원후(元詡)
이름
휘 원각(元恪)
별호 탁발각(拓跋恪)
묘호 세종(世宗)
시호 선무황제(宣武皇帝)
능호 경릉(景陵)
연호 태화(太和) 499년 ~ 500년
경명(景明) 500년 ~ 504년
정시(正始) 504년 ~ 508년
영평(永平) 508년 ~ 512년
연창(延昌) 512년 ~ 515년
<신상정보>
출생일 태화(太和) 7년 윤 4월 5일 (483년 5월 27일)
사망일 연창(延昌) 4년 1월 13일 (515년 2월 12일) (31세)
부친 효문제(孝文帝) 원굉(元宏)
모친 문소황후(文昭皇后) 고조용(高照容)
배우자 순황후(順皇后) 우씨(于氏)
황후(皇后) 고영(高英)
영황후(靈皇后) 호씨(胡氏)
위 세종 선무황제 원각(魏 世宗 宣武皇帝 元恪, 483년 5월 27일(음력 윤 4월 5일) ~ 515년 2월 12일(음력 1월 13일), 재위:499년 ~ 515년)은 중국 남북조 시대 북위(北魏)의 제8대 황제이다. 제7대 황제 효문제의 차남이다.
<생애>
황태자였던 맏형 원순(元恂)은 아버지 효문제가 추진하는 한화 정책에 반대해 반란을 모의했다가 폐위되어 죽었기 때문에 동생인 원각이 대신 황태자가 되었다. 499년 효문제가 세상을 떠나자 17세로 즉위했다. 초기에는 종실인 숙부 함양왕 원희(咸陽王 元禧), 상서령 왕숙 등의 보좌를 받았다.
재위중, 양나라를 공격해 사천지방으로 영토를 확대해, 북방에서는 유연에 대타격을 주었다. 하지만, 그는 불교 신자였고 점차 불교 신앙에 빠졌다. 501년, 국정을 측근이나 외척인 고조에게 맡겨 친정을 시작했으며 이윽고 황족들을 멀리했다. 508년 고조의 진언으로 황족의 어른인 숙부 원희와 그 막내 아우인 팽성왕 원협, 이복동생인 경조왕 원유 등 많은 황족들을 죽였다. 그리고 왕숙에 대해서도 자살을 명령했다. 아버지와 같이 33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해, 낙양 교외에 매장되었다.
<가계도>
황후(정비) : 순황후 우씨(順皇后 于氏) (488~507)
제 1황자 : 왕자 원창(元昌) (506~508)
황후(계비) : 숭헌황후 고씨 고영(崇憲皇后 高氏 高英) (~518)
황녀 : 건덕공주(建德公主)
황후(추존) : 영황후 호씨 (?~528)
제 3황자 : 태자 원후(元詡) (510~528) - (북위 효명제)
후궁 : 귀빈 사마씨 사마현자(貴嬪 司馬氏 司馬顯姿) (491~521)
후궁 : 귀화 왕씨 왕보현(貴華 王氏 王普賢) (487~513)
후궁 : 빈 이씨(嬪 李氏)
생모미상
황녀 : 태원공주(太原公主)
황녀 : 양평공주(陽平公主)
중국 낙양 북위 선무제 경릉(北魏 宣武帝景陵, Jǐnglíng)
선무제 원각(宣武帝 元恪, 483년 ~ 515년, 재위:499년 ~ 515년)은, 중국 남북조 시대의 북위의 제7대 황제. 묘호 세종(世宗)이며. 제7대 황제 효문제의 차남이다. 황태자였던 맏형 원순(元恂)은 아버지 효문제가 추진하는 한화정책에 반대해, 반란을 모의했다. 황태자의 자리를 폐위당하고, 아버지 효문제에 의해 살해당했다. 혹은 자살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원각이 황태자가 되었다. 499년에 효문제의 죽자 17세에 즉위했다. 초기에는 종실에서 숙부의 함양왕 원희(咸陽王 元禧, 헌문제의 둘째 아들로 효문제의 둘째 동생), 서경령의 왕숙 등의 보좌를 받았다고 한다.
재위중, 양나라를 공격해 사천지방으로 영토를 확대해, 북방에서는 유연에 대타격을 주었다. 하지만, 그는 불교 신자였다. 점차 불교 신앙에 빠졌다. 501년, 국정을 측근이나 외척인 고조(高肇)에게 맡겨 친정을 시작했다. 이윽고 황족들을 멀리했다고 한다. 508년에 고조의 진언으로, 황족의 어른인 숙부 원희와 그 막내 아우인 팽성왕, 이복동생인 경조왕 원유등 많은 황족들을 죽였다. 그리고 왕숙에 대해서도 자살을 명령했다고 한다. 아버지와 같이 33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해, 낙양 교외에 매장되었다.
이후 송나라,명나라등에서도 많은 원씨들이 등장하나 문헌이 부족하여 한국의 원씨와 연결하여 계대연결이 어렵다. 향후 원씨 문화 및 종사 에 대하여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Ⅲ. 원씨의 이동(원씨:元氏)과 북위 관련성 |
시중공계는 중시조로 북위의 7대황제 효문제 원굉(元宏)를 중시조로 조려하며, 원위(元魏)의 528년 하음의변 과 550년 북위가멸망하기까지 화를 피하여 일부 황족 원씨들이 유민들과 한반도 내륙인 고구려 와 신라로 그리고 해상으로 여러형태로 한반도로 흩어져 이동가능성이 높을것으로 사료하고 있다.
※ 참조 : 고구려 양원왕때 북위 이후 건국된 북제에서 북위유민을 돌려달라 하여 5천호를 데리고 갔다는 중국정사 기록이 있다.
북위황제가 우리원씨와의 연관가능성이 제일 높으며 인구 와 시기등이 역사적으로 이어짐을 연계해볼수 있다.
당시 한반도로 이동한후 처음에는 황족원씨들은 태백산맥줄기에 숨어서 살아야했고, 원씨성을 내세우며 사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여 일시적으로 성을 바꾸거나 서민화 되어 사용하지 않고 있다가 어느정도 정착하여 후손들이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시기부터 다시 황족의 성을 잊지않고 이어온 것이다.
이후 삼국사기의 신라,고려사에 기록된 일부 원씨들이 기록이 있으나 수많은 전쟁으로 사료 나 문헌 부족으로 정확한 계대연결 하기가 어렵다. 시중공계는 시기적,역사적연대를 볼 때 우리 원씨는 북위황제후손으로 연결함이 합리적으로 신뢰성이 높다고본다.
이후 수나라 당나라를 거치면서 613년 고구려 연개소문이 당나라에 요청하여 숙달외 8인을 도덕경 전달 하였다고 하며, 8인중 1명이 원경(元鏡) 이라는 설(說)도있다. 신라시대 와 통일신라시대에 많은 원씨들이 삼국사기에 문헌 기록되어 나타나고 있다.
원태(元泰) : 686년 신라 신문왕, 관직:아찬, 3월에 <서원소경>을 설치하 고 아찬 원태를 사신으로 삼았다.
원사(元師) : 688년 신문왕, 관직 : 중시, 8년 봄 정원에 중시 대장이 죽고 이찬 원사(元師) 가 중시가 되었다. 2월에 선부에 경 한사람을 증원하였다.
원선(元宣) : 효소왕 원년(692년) 8월에 대아찬으로서 중시가 되었다. 원선은 3년 뒤인 695년에 노환으로 물러났다.
원훈(元訓) : 성덕왕 원년(702년)에 아찬으로서 중시가 되었다.
원문(元文) : 성덕왕 2년(703년) 가을에 관직에서 물러난 중시 원훈 의 후임으로 중시가 되었다. 관등은 아찬. 2년만인 705 년 에 사망.
원흥(元興) : 헌덕왕 3년 (811년) 관등은 이찬이며, 봄 정월에 양종의 후임으로 시중이 됨. 그의 후임은 전임 시중인 김헌창 이 다시 맡았다.
원충(元忠) : 919년 관직 : 시중, 통일신라시대 강릉김씨(시조 김주원) 족보에 6세 선환(宣喚)의 사위로 등재 문헌발견.
원량검(元良儉) : 949년 원충의 아들 평장사
<시중벼슬 (신라)>
시중은 신라의 관직이다. 당나라의 문하시중을 본따 만든 직책이며 원래 651년 진덕여왕 시절에 처음 시행된 관직이다. 당나라의 시중은 내각의 수상격이었으나 신라의 시중은 진골 귀족의 대표자인 상대등을 견제하기 위해 만든 직책이었다. 원래 이름은 중시(中侍)였으나 747년 경덕왕 시절에 집사부(執事部)의 장관의 관직으로서 시중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681년 신문왕 즉위년에 김흠돌의 난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진골 귀족을 대거 숙청하면서 상대등의 기능을 약화시켰으며, 왕명 출납, 왕의 시위 등을 담당하던 중시, 즉 시중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신라가 통일하면서 .전국여러곳에 에 정착하여 살고 있었으며 신라가 부패하여 원회(元會),원종(元宗)등 원씨들이 궁예왕을 도와 후고구려(태봉)를 건립하였다.
918년 왕건이 고려를 건국후 5년 안동호족 이던 원봉(元奉,元逢) 은 922년 왕건에게 항복후 안동 풍산읍(하지현) 지방을 순주(順州)라는 이름으로 승격시키고 본성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고려 건국을 도운 벽산공신 병부령 원극유(元克猷) 등 고려사에 기록된 많은 원씨들이 있으나 수많은 전쟁으로 자료 나 문헌 부족으로 정확한 계대연결 하기가 어렵다. 고려개국하면서 원씨들은 원주에 집성촌을 이루어 살면서 원주원씨의 본관을 얻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수많은 원씨들(지광국사(원수몽)이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아득히 먼 옛날이고 정확한 계대연결이 어려워 고려국 이상 위의 원씨는 모두 우리 원주원씨의 선조님들로 모두를 중시조로 봉위함이 옳은 것이 아닌가 한다.
조선시대이후 현재까지는 조선왕조실록등 기록과 문헌에 의거하여 시중공계, 원성백계, 운곡계대 연결를 하여 족보를 만들어 쉽게 볼수 있게 하였다.
Ⅳ.원주원씨 시중공계 중시조와 족보역사 |
원주원씨 시중공계 세보가 처음 간행된 것은 1,739년 영조15년 창하 원경하(元景夏)공에 의한 을미 초간보에 의해 시작되었다.
원주원씨 시중공계의 일세조에 관해서는 1,739년 초간보를 발행할 당시 경하공꼐서 원익겸(元益謙)공을 일세조로 모시면서 그앞의 자손록 첫머리에 원유염공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밝혀 놓으셨다. 이부상서(육부수장),동국제성보 씨족원류 등의 책이나 여러 종친의 집에서 소장한 것에는 모두 公(공)을 우리 시종의 선친으로 삼고있으나 그럴만한 명문 근거가 없어 지금 그에 따르지 않는다.
삼가 여러 종친과 깊이 의논하여 별도로 책머리에 기록하면서 삼가 신중한 뜻을 보이고 다시 더 훌륭한 상고를 기다린다. 이는 후손들에게 종사에 다름에 있어서는 경솔하게 추단하거나 억측하지말고 가거명문을 통해 삼가고 또 삼가면서 임해야 함을 밝힌 것이라 하겠다.
일세조 앞 선조에 대하여는 추후 단군조선, 중국25사기, 고조선,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역사자료 등에서 근거할만한 자료나 단서가 있다면 그를 근거로 종친들과 논의하여 계대를 연결하여 주기를 바란다.
을축보(1956년) 발행당시에 시중공계, 운곡계, 원성백계 등 삼계가 시조를 평장사공 원경으로 단일화하여 통합보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하였으나, 이러한 시도는 계대를 뒷받침할 만한 문헌의 근거가 불확실하여 실패하고 삼계가 각자 독립적으로 족보를 편찬하였다. 지금까지 발견된 시중공계 일세조 이전의 계대를 밝혀주는 문헌에는 노승이 전한 가승이 있고, 운곡계구보, 고려개국공신 관한 화벌보 등이 있는데 모두가 필사본으로 사료로 인정하는데는 어려움이 있다.
운곡계의 구보와 노승이 전한 가승에 의하면 시중공계는 원경(元鏡)의 큰손자 희적(希跡)후손이 되어 원경(元鏡)평장사공계 와 뿌리가 같고, 고려개국공신에 대한 화벌보에 의하면 시중공계는 원극유(元克猷)의 후손이 되어 원성백계 와 뿌리를 같이한다. 그러나 구족보에 원씨는 신라로부터 이어왔다라고 선조들의 기록하여 신뢰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이와같이 시중공계의 시조에 관해서는 평장사공계 원경(元鏡)설과 고려개국벽상공신 원극유(元克猷) 설이 있는데, 계대연결의 근거와 문헌부족으로 을축보 편찬 당시의 견해대로 일세조를 종전과 같이 원익겸공(元益謙公)으로 하고, 원유염 공은 초간보 발행당시 경하공 이하 여러 종친들이 고민하여 정하신대로 따르기로한다.
“중원을 되찿을 때까지”
Ⅴ. 元 字 바로 읽기 |
1.한자사전
元
元 [으뜸 원]
1. 으뜸, 처음, 시초(始初) 2. 우두머리, 두목(頭目), 임금 3. 첫째, 첫째가 되는 해나...
[부수]儿 (어진사람인발) [총획] 4획
• 1. 으뜸, 처음, 시초(始初)
• 2. 우두머리, 두목(頭目), 임금
• 3. 첫째, 첫째가 되는 해나 날
• 4. 기운(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오관(五 官)으로 느껴지는 현상), 천지의 큰 덕, 만물(萬 物)을 육성하는 덕
• 5. 근본(根本), 근원(根源)
• 6. 목, 머리
• 7. 백성(百姓), 인민(人民)
• 8. 정실(正室), 본처(本妻)
• 9. 연호(年號)
• 10. 화폐(貨幣)의 단위(單位)
• 11. 나라의 이름
• 12. 시간(時間)의 단위(單位)
• 13. 크다
• 14. 아름답다, 착하다
자원(字源)
회의문자
元자는 ‘으뜸’이나 ‘시초’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갑골문에 나온 元자를 보면 人(사람 인)자의 머리 부분에 획이 하나 그어져 있었다. 元자는 본래 사람의 머리를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일의 시작이라는 의미에서 ‘으뜸’이나 ‘시초’, ‘근본’, ‘우두머리’와 같은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몽골의 제5대 황제인 쿠빌라이가 세운 나라 이름도 원(元)이었다. 1279년 남송을 정복하고 중국을 통일한 원나라도 ‘으뜸인 나라’를 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형성 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