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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의 지은이 허균, 원주 법천사지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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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종사와족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4-03-01 01:11 조회210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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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법천사(遊 原州 法泉寺) 허균(許筠)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6권 문부(文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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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의 남쪽 50리 되는 곳에 산이 있는데 비봉산(飛鳳山)이라 하며, 그 산 아래 절이 있어 법천사(法泉寺)라 하는데 신라의 옛 사찰이다. 나는 일찍이 듣기를, 태재(泰齋유방선(柳方善)1) 선생이 그 절 밑에 살자, 권길창(權吉昌 길창은 권남(權擥)의 봉호)ㆍ한상당(韓上黨 상당은 한명회(韓明澮)의 봉호)ㆍ서사가(徐四佳 사가는 서거정(徐居正)의 호)ㆍ이삼탄(李三灘 삼탄은 이승소(李承召)의 호)ㆍ성화중(成和仲, 성간成侃和仲)이 모두 쫓아와 배워 이 절에서 업을 익혀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고, 혹은 공을 세워 나라를 안정시켰으므로, 절의 명성이 이로 말미암아 드러났으니,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그곳을 말하고 있다.

내 선비(先妣)의 산소가 그 북쪽 10여 리쯤에 있으므로 매년 한 번씩 가서 성묘하였으나법천사라 하는 곳에는 아직 가본 적이 없었다. 금년 가을에 휴가를 얻어 와서 얼마 동안 있었는데, 마침 지관(智觀)이란 승려가 묘암(墓菴)으로 나를 찾아왔었다. 인하여 기축년(1589)에 일찍이 법천사에서 1년 간 지낸 적이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유흥(遊興)이 솟아나 지관을 이끌고, 새벽밥 먹고 일찍 길을 나섰다. 험준한 두멧길을 따라 고개를 넘어 소위 명봉산(鳴鳳山)에 이르니, 산은 그다지 높지 않으나 봉우리가 넷인데 서로 마주보는 모습이 새가 나는 듯했다. 개천 둘이 동과 서에서 흘러나와 동구(洞口)에서 합쳐 하나를 이루었는데, 절은 바로 그 한가운데 처하여 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난리에 불타서 겨우 그 터만 남았으며, 무너진 주춧돌이 토끼나 사슴 따위가 다니는 길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비석은 반 동강이 난 채 잡초 사이에 묻혀 있었다. 살펴보니 고려의 승려 지광(智光)2)의 탑비(塔碑)였다. 문장이 심오하고 필치는 굳세었으나 누가 짓고 쓴 것인지를 알 수 없었으며 실로 오래되고 기이한 것이었다. 나는 해가 저물도록 어루만지며, 탁본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중은,

이 절은 대단히 커서 당시에는 상주한 이가 수백이었지만, 제가 일찍이 살던 소위 선당(禪堂)이란 곳은 지금 찾아보려 해도 가려낼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서로 한참 탄식하였다. 절의 동편에 석상과 자그만 비석이 있어, 살펴보니 묘가 셋인데 모두 표지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본조(本朝)의 정승 이원(李原)3)모친의 분묘요, 하나는 태재(泰齋, 즉 유방선)의 묘인데 그 아들 승지 유윤겸(柳允謙)이 뒤에 묻혀 있었다.

나는,

()의 부인은 곧 나의 선조 야당선생(埜堂先生)4)의 따님이시다. 나는 듣기를, 정승이 처음에 그 모친을 장사할 때 술자(術者)그 땅에는 왕기(王氣)가 있다.’고 말했는데, 끝내 이 때문에 죄를 얻었으므로 자손들이 감히 뒤따라 묻히지 못했다 했다. 태재는 곧 사위인데, 이곳에 거주했으니 반드시 이로 인하여 끝내 궁한 채 죽었기 때문에 여기에 묻힌 것이 아니겠는가. 연대가 오래되어 알 수 없구나.”

했다. 인하여 배회하고 둘러보며 옛 일을 애달파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지관에게,

인생에 궁달(窮達)과 성쇠(盛衰)가 있는 것은 실로 운명이다. 그리고 불후의 명성이란 이런 데 있지 않다. 이원(李原)이 좌명 공신(佐命功臣)으로서 대신의 지위를 차지하여 부귀와 권총(權寵)이 일시에 자자했으며, 사람들이 모두 우러르며 추종했건만, 끝내 이 때문에 기휘(忌諱)를 당하여 버림받아 죽고 말았다. 이윤겸은 세종대왕을 섬겨 시종신(侍從臣)이 되어 대궐을 출입하며 거듭 거룩한 은총을 입어 마침내는 왕명의 출납을 맡기에 이르렀으니, 귀하게 되었다고 할 만하다. 태재는 학문과 덕행을 지니고도 가환(家患)으로 인하여 그 몸이 금고(禁錮)되어 한참 곤궁할 때에는 베옷이 몸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였으며, 날마다 끼니를 거르고 도토리ㆍ밤 따위를 주워다 자급(自給)하면서 산중에서 곤궁하게 지내다가 남은 일생을 마쳤다. 이제 그의 시를 보면 맹 참모(孟參謀)와 가 장강(賈長江)5) 과 같으니, 얼마나 곤핍하고 가난에 시달렸는지를 알 수 있다. 위의 두 분에 비하면 영달과 초췌가 어떻다 하겠는데 지금 수백 년이 지난 뒤에도 사람들이 그의 글을 읊으며 그 인품을 상상해 마지않을 뿐더러 심지어는 보잘것없는 산과 촌스러운 절이라 기이하고 화려한 구경거리도 아니다. 또한 세상에 소문이 나고여지승람에 실려 전한다. 저 두 분의 화려하고 드날리던 모습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비단 그 육신만이 매몰되었을 뿐 아니라, 그 이름을 말해도 사람들은 어느 시대 사람인지조차 모른다. 그렇다면 일시에 이득을 누리는 것이 만대(萬代)에 이름을 전하는 것과 어찌 같겠는가.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취사선택하게 한다면 전자이겠는가, 후자이겠는가?”

하였다. 지관은 껄껄 웃으며,

공의 말씀인즉 옳습니다. 다만 천추 만세(千秋萬世)의 이름은 적막한 신후(身後)의 일이라는 두보의 시가 있으니, 옛사람이 또한 명성이 누가 된다고 하여 남에게 알려지기를 원치 않은 자도 있으니 도대체 홀로 무슨 마음에서였을까요?”

하였다. 나는 크게 웃으며,

이것은 그대 불가의 교리가 아닌가.”

하고 나서 말고삐를 나란히 하여 돌아섰다.

기유년(1609, 광해군1) 928일에 쓰다.

 

()

[1] 유방선(柳方善) : 세종(世宗) 연간의 학자로서 시문(詩文)에 뛰어났고, 그의 문하에서 서거정(徐居正) 등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2] 지광(智光) : 고려(高麗) 문종(文宗) 때의 국사(國師). 아명(兒名)은 수몽(水夢)인데, 후에 해린(海麟)으로 개명, 자는 거룡(巨龍), 시호(諡號)는 지광, 법호(法號)는 융소(融炤), 속성은 원(), 본관은 원주(原州)이다법천사(法泉寺)에서 죽었다.

[3] 이원(李原) : 정몽주의 문인으로 고려와 조선조에 벼슬하였다. 세종 때 노비 문제로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을 받고 여산(礪山)에 안치(安置)되었다가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4] 야당선생(埜堂先生) : 야당은 고려의 문신인 허금(許錦, 1340~ 1388)의 호. 우왕(禑王) 때 좌상시(左常侍)를 거쳐 전리 판서(典理判書)까지 지냈다. 본관은 공암(孔巖: 陽川). 자는 재중(在中)으로, 양천군(陽川君) ()의 손자이며, 지신사(知申事)를 지낸 경()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죽산박씨(竹山朴氏)로 원()의 딸이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5] 맹 참모(孟參謀)와 가 장강(賈長江) : 맹 참모는 당() 나라 때의 시인(詩人) 맹교(孟郊)를 말한다. 주서참모(奏署參謀)를 지냈으므로 이렇게 부른다. 가 장강은 당 나라 때의 문인 가도(賈島)를 말한다. 장강 주부(長江主簿)를 지냈으므로 장강이라고 부른다.

한국고전번역원 김명호 ()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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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원주 법천사기(遊原州法泉寺記) 허균 찬, 출처 : 성소부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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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州之南五十里。有山曰飛鳳。山之下有寺曰法泉。新羅古刹也。余嘗聞泰齋柳先生方善居于寺下。權吉昌,韓上黨,徐四佳,李三灘,成和仲皆就學隷業於寺。或以文章鳴於世。或立功業以定國。寺之名。由是而顯。至今人能說其地。余亡妣夫人。葬于其北十里許。每年一往省焉。所謂法泉寺。尙未之游。今年秋。乞暇而來。稍間。適有上人智觀訪余于墓菴。因言己丑歲。曾住法泉一臘。游興遂發。拉上人蓐食早行。從峽路崎岴逾嶺。至所謂鳴鳳山。山不甚峻。有四峯對峙如翥。二川出於東西。至洞口合爲一。寺正據正中面南。而燬於兵。只有餘址頹礎。縱橫於兔閌鹿逕之間。有碑半折。埋於草中。視之。乃高麗僧智光塔碑。文奧筆勁。不能悉其名氏。眞古物而奇者。余摩挲移晷。恨不能摹榻也。上人曰。此刹甚鉅。當日住社幾千指。我曾寓所謂禪堂者。今欲認之。不可辨矣。相與嚱噓者久之。寺東偏有翁仲及短碣。就看則三墓皆有表。一則國朝政承李原之母之墳。一則泰齋之藏。而其子承旨允謙從焉。余曰。原之夫人。卽吾之先祖野堂先生 諱錦 之女。吾聞政丞初窆其母。術者言其地有王氣。終以是獲罪。故子孫不敢從。泰齋卽贅也。其居此必因是而卒窮以死。故仍卜兆也歟。年代久遠。不可知矣。因徘徊俯仰。不勝其弔古之懷。謂上人曰。人之有窮達盛衰。固其命也。而名之不朽。不在於是。原以佐命勳臣位台揆。富貴權寵。熏藉一時。人皆仰而趨之。終以此見忌廢死。而允謙事莊憲王。爲帷臣出入禁闥。荐被恩渥。竟至於喉舌納言。可謂貴矣。泰齋則抱負文行。因家患錮其身。方窮阨時。布褐不掩體。日倂食。拾橡栗以自給。枯槁於山中。以了殘年。今看其詩如孟參謀賈長江。可知其困楚酸寒。其比二公。榮悴爲何如。而至今數百年後。人誦其文。想見其爲人不替。至令殘山野刹非奇偉瑰秀之觀。亦聞於世。而載在輿地。彼二公之芬華顯揚者。今何在哉。不徒其身之理沒。而道其名。人莫曉爲何代人。然則與其享利於一時。曷若流名於萬代乎。使後人取舍。其在是乎。在彼乎。上人囅然曰。公之言則是矣。但千秋萬歲名。寂寞身後事。而古人亦有以名爲累。不願知於人者。抑獨何心耶。余大噱曰。是汝家法也。亟聯轡而回。己酉秋九月二十八日。記。
ⓒ 한국고전번역원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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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해제,  신호열(辛鎬烈) 씀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는 양천(陽川) 허균(許筠, 1569~ 1618)의 시문집이다.
▸ 허균은 자를 단보(端甫), 호를 교산(蛟山)이라 했는데, 성소(惺所) 또한 그의 별칭이다. 초당(草堂) 엽(曄)의 제3자로 태어나, 악록(岳麓) 성(筬)ㆍ하곡(荷谷) 봉(篈)은 백중(伯仲)이요, 난설헌(蘭雪軒)은 그의 자씨(姊氏)였으니, 실로 규운(奎運)이 허씨 일문에 췌집(萃集)되었던 것이다. 특히 그는 총명이 절륜하고 문장이 환발(煥發)하여 일세를 용동(聳動)케 했다.
⦁ 그는 선조(宣祖) 27년(1594)에 등제(登第)하여 사로(仕路)에 첫걸음을 내딛었고, 동(同) 30년(1597)에는 정시(庭試)에 장원의 영광을 차지한 바 있었다. 그 후 광해군(光海君) 10년(1618)에 모반(謀反)의 혐의로 서시(西市)에서 처형되었는데, 이때 나이 50이었다.
⦁ 그의 생애는 참으로 감람 험희(坎壈險巇)하였다. 출사(出仕)한 이래 비방과 모함이 꼬리를 물어 곤돈 낙척(困頓落拓)하여 십수 년을 낭료(郞僚)의 신세로 부침(浮沈)하다가 급기야 말년에 대북파(大北派)와 접근하면서 취진(驟進)하여 형조 판서(刑曹判書)ㆍ우참찬(右參贊)의 지위에 이르게 되었으며, 그의 존재는 마침내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으로 하여금 좌시(坐視)할 수 없게 하였다. 결국 정치 권력의 와중(渦中)에서 그는 참혹한 최후를 마친 것이다.
【어휘 풀이】
감람(坎壈) : 형용사 1. [文語] 피곤해서 녹초가 된 모양.  2. 뜻을 얻지 못한 모양.
험희(險巇) : 1. 산길이 험하다  2. 앞길이 험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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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천사(法泉寺)라는 이름의 옛 사찰은 역사적으로 몇이나 있었는지는 모르나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에 있었던(임란 시 화재로 소실燒失) 법천사 외에도 지금까지 알려진 사찰로는 경남 양산시 금정산에 있는 법천사, 전북 무안군 승달산에 있는 법천사 등이 있었던 것으로 전합니다.
또, 허균 외에도 고려 때와 조선 초기에 서거정 등의 유명한 인물들이 지은 법천사 관련 문장이나 싯구절 등을 찾아서 같이 감상할 수 있도록 올리겠습니다.